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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ie Sep 05. 2021

세비야 교외에서 와인에 취하다

  - 세비야, 스페인



  재스민과 출발 시간이 같은 버스를 예약했는데, 세비야에서 묵을 호스텔은 예약이 다 차 버려서 구하지 못했다. 사실 우리는 그라나다에서부터 함께 여행하자고 미리 약속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말 나온 김에 말라가에 함께 왔고, 다음 행선지가 둘 다 세비야인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그곳에 함께 가자고 정해둔 것도 아니었다. 


  재스민은 세비야에 호스텔이 아닌 에어 비앤비의 싱글 룸을 3일 예약해 두었던 참이고, 드디어 혼자서 방을 쓸 수 있다는 것에 들떠 있었다. 나는 할 수 없이 3일 밤에 280유로나 하는 호텔을 예약했다. 사진 상으로는 야외 수영장도 있고 꽤 근사해 보여서, 혼자 쓰기에는 너무 아까운 곳이었다.     


  세비야에서는 재스민과 숙소가 서로 달랐기 때문에, 저녁때쯤 만나서 함께 저녁도 먹고 돌아다니기로 했다. 세비야 버스 터미널에 도착해서 안내데스크에 호텔 가는 길을 물었더니 시외버스를 타라고 한다. 

  ‘뭐야? 세비야 시내가 아니었어?’ 

  게다가 그곳에 가는 버스는 1시간 반을 기다려야 온다고 했다. 무슨 낭패람? 어쩐지 호스텔까지도 전부 예약이 차 버린 세비야의 호텔치고 값이 싼 편이네 했었다. 


  그렇게 한 시간 반을 기다린 버스는 호텔까지 40분 걸린다더니, 가는 길이 막혀서 1시간 넘게 걸렸다. 도착했을 때는 이미 3시를 넘기고 있었다. 그래도 호텔은 조용하고, 뒤편에 너른 잔디밭과 썬배드들이 놓여있어서 마음에 들었다. 모처럼 편하고 자유롭게 샤워를 하고 세비야에 갈 차비를 하고 나왔다.     


  버스에서 내릴 때 보니 호텔 맞은편에 분위기 좋은 바 레스토랑이 보였다. 길을 건너서 그곳에 들어갔더니 두 테이블 정도에 손님들이 있었는데, 내가 들어가자 모두들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난 참치 샐러드와 화이트 와인 한 병을 시켰다. 한 잔이 아니라 한 병을 시킨 이유는 4유로밖에 안되어서였다. 마시다 남은 것은 호텔 잔디밭에 앉아 마시면 될 터였다. 



호텔 앞의 바 레스토랑


  테이블에 차려진 빵과 신선한 샐러드, 화이트 와인이 참 보기 좋았다. 주인 할아버지가 내게 꽃 한 송이를 갖다 주었다. 그러면서 스페인어와 몸짓으로 호텔에 묵느냐고 묻고, 맛있게 먹으라며 다정하게 내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몸집이 큰 웨이터가 잔이 빌 때마다 와서 와인을 따라주었다.     





  그렇게 와인 세 잔 정도를 마셔 얼큰히 취했을 때, 주인 할아버지가 자신의 테이블로 나를 초대했다. 그곳엔 웨이터와 손님인 듯한 할머니가 함께 있었다. 웨이터만 약간 서툴게 영어를 했고, 그 둘은 전혀 영어를 하지 못했다. 할머니의 이름은 마리였고 이 동네에 사는 손님이자, 주인 할아버지와는 친구라고 했다. 식당엔 우리뿐이었다.


  할아버지가 디저트를 내와서 나와 마리에게 스푼으로 떠먹여 주었다. 마리가 내게 몇 살이냐고 묻자 나는 손가락 5개, 그러고 나서 3개를 함께 펴보였다. 그러자 웨이터가 ‘35’라고 통역했고, 두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크크. 서른다섯이란다.    

  서양 사람들의 눈에는 동양 여자들의 나이가 가늠하기 어려운 모양이다. 그들 눈엔 웃을 때 눈가와 콧등에 자글자글한 나의 주름 따위는 안 보이는 것 같다. 난 굳이 정정하지 않고 그냥 서른다섯 인 듯 그렇게 함빡 웃으며, 그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내가 내일은 세비야에 갈 거라고 했더니, 할아버지는 자기 남동생도 세비야에서 식당을 한다고 들러보라며 주소와 이름을 적어주었다. 그렇게 뜻하지 않았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호텔로 돌아와, 잔디밭 비치의자에 앉아 남은 와인을 마시며 책을 읽었다. 



세비야 호텔에서 남은 와인을 마시며



  방에 들어와 바라본 해진 하늘빛이 좋아서, 불을 끈 채 창과 커튼을 열어 두었다. 재스민에게 이렇게 취하게 된 상황을 얘기하면서 오늘은 못 가겠다고, 내일 만나자고 메시지를 보냈다.

  늘 망쳤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선물처럼 너무 좋은 일이 생기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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