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날 더듬어 다시
지난 반년을 브런치를 해보겠다고 덤벼 작심삼일로 마감하고 알림으로 받은 다른 작가님들의 글을 훔쳐보며
부러워하고 스스로 자괴하고 시간을 보냈다. 아니, 언제까지 살 수 있다는 보장도 없으면서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는 말이 맞겠다.
매달 두 건의 글을 정기적으로 납품하는 것 외에 별로 할 일이 없는 것 같다.
세상의 공기와 바람과 시간과 계절에게 미안함을 느낀다.
핑계 같지만 널뛰는 저질체력을 끌어안고 사는 허약한 이의 고충은 나의 몫이니 변명할 여지도 없다.
다시 해보려니 쑥스럽고 또 언제 그만둘지 모르는 나의 변덕에 덫이라도 놓아 계속 쓰고 싶은 사람으로
남고 싶다. 왜 이 욕망은 잦아들지 않고 나의 노화와 관절의 삐걱거림에도 싱싱하게 살아있단 말인가.
타인의 욕망을 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골몰한 적도 있지만 순도 높은 나의 욕망임을
확인하며 다시 이렇게 이 공간에 글자를 앉힌다.
이 나이가 되어도 아직 나를 알아가고 취향을 만들고 다시 부수고 (편견이 깨지기 전까진 그것이 편견인 줄 모르기에) 나를 찾아가는 길 끝에 온전한 내가 있기를 간절히 원하면서.
며칠 전, 교육대학교에서 그동안 수업했던 것을 모아 성과 발표회를 열었다. 가르친 게 하루이틀도 아니고
난 가르치는 것에 달란트도 있고 별생각 없이 수업했다. 또 미적? 감각은 쫌 있어 피피티를 만들어 제출까지는 괜찮았는데 문제는 발표회가 있던 날.
물론 나는 처음 수업이었고 성과 발표회도 처음이었으나 자료집을 미리 받아 보았고 어떻게 진행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것을 바탕으로 자료를 만들었으므로.
다른 강사들의 발표를 보며 내가 얼마나 허술하고 매사에 대충 하려는 성향이 있는지 심장이 쫄깃해지게 절감했다. 교수님과 학교 교장, 담당선생님, 줌으로 발표회를 보고 있을 몇십 명의 관계자들 앞에 표 나지 않게
그럭저럭 발표는 끝났지만 조금만 관심을 갖고 보았다면 내가 얼마나 얕고 얇은 강사였는지 보였을 것을
생각하니 낯이 뜨거워 견딜 수가 없었다.
스스로에게 반성문을 제출했다. 경위서라고 해야 하나. 그것도 모자라 지금 나는 여기에 다시 끄적이고 있다.
자기 앞에 조금이라도 정직하게 살고 싶다. 나한테 부끄럽지 않게 살고 싶다.
로맹가리가 쓴 <자기 앞의 생> 주인공 모모처럼. 나를 증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 자신뿐 이라는 하밀 할아버지의 말씀을 기억하며 분명 나에게도 아름다운 구석이 있을 것이라는 소망으로 마음의 올 잡아당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