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오래"
그만큼 인간의 본성으로는 잘 안되고 못하는, 할수도 없다는 것을!!
하지만 해내야만 인간 너머 어떤 존재로 거듭나기 때문일 것이다.
배고픔을 참지 못해 다이어트는 작심 하루 되기 일쑤고
뒷담화를 참지 못해(하라리는 뒷담화가 인지혁명의 핵심이라고 주장했지만서두) 관계가 빠그러지고
심지어 해야 할 말과 참아야 할 말을 분별하지 못해 분위기를 순간 살벌하게 만들기도 한다.
또 이런 자신이 능멸스러워 자책골 넣은 사람처럼 방구석에서 이불킥을 한다.
사실 이불킥을 하는 사람은 그래도 자아 성찰지수가 있는 사람이다.
안 그런 사람이 많은 것도 사실.
그럼에도 오래 참는 것(참아 주는 것 포함)은
생명을 살리는 일 임에 틀림 없다.
그 결과가 혹 생각과 다르고 참담하더라도 참고 지켜 본다는 것은 자신에게도 좋은 수행이 된다.
참고 암에 걸리거나 참고 정신병에 걸린다면 건강하게 참았다고 할 수 없는 것 일테고 그러느니
차라리 자신의 정신건강을 위해 참지 말고 지랄하는 것을 권한다.
물론 참는 것도 자신의 정신건강에 좋다고 한다면 해보는거지.
그러더니 요즘 그런다네, 오래 참고 잘 참는 사람의 결국은 '호구'라고.
어릴 적, 난 물에 술탄 듯 술에 물 탄 듯 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흘러가는 물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시간을 보내고 허허 ... 이러면서 살고 싶던
간절하게 철없던 시간이 있었다. ㅎ 얼마나 철이 없었단 말인가!
아무튼 그래서 뭐든 그냥 넘기기가 다른 사람보다는 쉬었다.
인복이 있어서 그랬는지 심각한 손해를 본 적도 없고 감정적으로 치료를 받을 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즉 적당한? 손해나 타인의 무시쯤은 뭐 괜찮다.
하지만 이렇게 참고 바라봐주고 지켜봐 주는 것이 결국엔 호구가 된다니.
아무래도 내가 너무 오래 살았나보다. ㅠ
무조건 참는 것은 제고해봐야 겠지만 자기 깜량만큼 참는 것은 더 깊은 자아의 길로
자신을 안내하지 않을까. 사유도 차원 높아지지 않을 까.
참는 것과 쏟아내는 것의 균형을 생각해야 하는 때이다.
나는 나한테 잘하고 싶다. 잘 해주고 싶고 잘 보이고 싶다.
나의 모든 행동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참는 것, 져주는 것, 손해 보는 것 등이 자신에게 타격감이 없고 생각하고
사유하는 꼬투리가 된다면 참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