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후하게 대해 줘 볼게요

애매한 무기력함과 잔잔한 자책 사이

by 이지현

나는 나의 잘난 모습만큼 못난 모습도 많이 알기에 등을 토닥여 줄 수 없습니다. 매일매일 살아가고자 하는 모습들을 내 눈으로 보는데도 침대에 누우면 잘 못했던 것만 생각나기 일쑤입니다. 그저 머릿속을 비우려 애쓰며 잠에 듭니다. 수면안대의 힘을 빌리면 30분 정도 빨리 자는 것 같습니다.

잠에서 깨 비몽사몽한 그때가 가장 좋습니다. 따뜻한 이불속에 파묻혀 있어도 좋을 것 같고, 쌀쌀한 공기를 마시기 위해 창문을 여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살을 파고드는 차가운 바람의 거친 환대가 오늘도 정신 차리라는 것 같아서 추워도 겉옷을 입지는 않습니다. 겨울이 다가오는 지금, 간밤의 여운을 따뜻한 차로 몸을 데워 흘려보냅니다.


언제나처럼 배가 고픕니다. 어제 뭐라도 해보겠다고 만들어놓은 카레가 있습니다. 왠지 모르게 카레 말고 계란프라이가 먹고 싶습니다. 카레는 점심때 먹기로 하고, 밥을 먹으며 볼 영상을 고릅니다. 요즘엔 넷플릭스에 있는 다큐 <인피니티:무한의 세계로>를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유한'한 것에 집중하지 '무한'한 것에 익숙하지는 않으니 꽤 재미있습니다.


밥을 다 먹고, 설거지를 하고, 널브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담습니다. 그러면 이제 일을 하러 가야 합니다. 아이들에게 수학을 가르치는 건 꽤 괜찮습니다. 못 알아들을 땐 답답하지만 아이가 깨달은 듯 문제를 풀어내면 그것만큼 기쁜 게 없습니다. 최저시급보다 많이 받는다는 것도 좋지만, 아이들의 맑고 장난기 있는 목소리가 마지막 남은 에너지를 끌어다 쓰게 합니다.


오늘만큼은 집에 돌아와서 씻고 바로 자지 않고, 노트북을 켜 글을 써보기로 합니다.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 더 일찍 일어나 보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떠오르는 못난 모습들을 흰 화면에 써내려 없애고 잠에 들고 싶습니다. 어째 쓰고 보니 못난 모습들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못난 모습들은 하루 24시간 중 딱 1시간 정도인 것 같습니다. 그마저도 잠깐 멍 때렸던 것, 게임 두 판, 빨래를 바로 개지 않은 것 정도인 것 같습니다.


어제 저녁에는 뭐가 그렇게 걱정이었길래 잠에 드는 게 괴로웠을까요. 지금은 멀리 내다보기보다는 가까이에 있는 오늘 하루 잘 보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침대에 누워 쓸데없는 생각 말고 잠들기 1일 차. 30일 차가 넘어가면 그땐 일주일 정도의 미래를 생각하는 건 가능할 것 같습니다. 더 일찍도 되겠지만 천천히 하기로 합니다. 매번 빨리 하겠다고 이 사달이 난 거니까요.



스스로에게 조금 후하게 대해 줘 볼게요.


기다려주고, 기회를 봐서 살살 끌어내준 사람들에게 감사합니다. 덕분이에요.

수,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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