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군은 자기 실수로 컵을 깨거나, 신호위반 딱지를 떼거나, 예약하지 않아서 허탕을 쳤거나, 사소한 실수로 사소한 손해가 발생하면 크게 상심하고, 심각해진다.
내가 애지중지 하는 컵을 백군이 실수로 떨어트려서 박살이 나면 (내 마음도 박살이 나는데) 나보다 더 길길이 자책을 해서 거기다 도저히 뭐라고 할 수가 없는 상황이 된다.
입을 꽉 깨물고 심한 말(조심 좀 하지, 애가 왜 이렇게 조심성이 없어. 그래 놓고 화는 왜 니가 내는 건데. 아까워 죽겠네)을 삼키며 "괜찮아, 안 다쳤으면 됐어~."라고 말해도 백군의 화는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그래도 이 정도는 좀 귀여운 편이다.
가만히 있는 담벼락에 차를 비빈다거나, 전재산을 주식에 투자해서 대폭락을 경험하거나, 다양한 방법으로 가계에 손실을 가져오기도 하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내 기분이 나빠질 새도 없이 백군을 위로해야 하는 신세가 된다. (이시키 이거 고도의 전략인가)
평소에 내가 그보다 많은 실수를 하기 때문에 할 말이 없는 것 아니냐고 합리적인 의심을 해볼 수 있겠지만 의외로 나는 이런 식의 실수가 없는 편이다. 어쩌다 내가 실수를 할 땐 빠르게 사과하고 좀처럼 기분이 상하는 일도 없다. 이런 내가 내 기분에 우선해서 백군을 위로하는 것은 순전히 나를 위해서다.
백군은 트러블 자체를 혐오하고 나는 험악한 분위기를 혐오한다.
백군은 트러블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평소에도 많은 노력을 한다. 준비성도 철저하고 항상 속 편한 나를 대신해서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조금만 배고프면 짜증이 나는 본인을 알기에 스스로 요리도 하고, 피곤하면 기분이 가라앉아 분위기를 나쁘게 만들지 않기 위해 좋아하던 술이나 커피도 거의 하지 않는다. 여러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이어온 성격이 쉬 고쳐질 리 없다는 걸 알아서 나도 이해하고 있다.
오늘 아침으로 닭갈비를 해주겠다고 한껏 들떠있던 백군은 요리를 완성해 한입 먹더니 표정이 좀 이상해진다. 윗집에서 준 반조리 닭갈비를 바로 먹지 않고 냉장고에 며칠 묵혀두어서 상해 버린 것이다. 내가 아는 백군이라면 이런 상황을 좋게 넘길 리가 없다. 백군이 싫어하는 모든 것을 갖춘 상황이다.
1. 음식을 버리는 것.
2. 냉동실에 넣거나 바로 먹지 않아서 음식을 상하게 만든 실수를 한 것.
3. 상한 음식을 요리하는 헛수고를 한 것.
4. 배고픈데 먹을 게 없는 것.
막 요리한 닭갈비를 음식물쓰레기에 버리는 백군의 뒷모습을 보며 위기상황을 직감했다.
그런데 웬걸.. 찡그림도 없이 '아~ 너무 아깝다.'그러고 마는 것이다. 뭐지..?
내가 "여보, 우리 위기상황이다. 닭갈비 시켜먹을까?"라며 웃으며 농담을 해도 다 받아준다.
이런 기분 처음이다. 위기의 상황을 웃으면서 같이 헤쳐나가는 기분.
약간의 안 좋은 일이 있어도 우리의 기분에 영향을 주지 않는 이 평화로움.
늘 이렇다면 어떤 트러블도 두렵지 않을 것만 같다!!
그럴 수 있었던 비결을 묻자 씩 웃으며 하는 말.
"한번 웃어넘기니까 별게 아니게 됐어. 심각해질 타이밍도 놓쳤고. 우연히 얻어걸린 상황이라고 보면 돼."
그래! 이 기분을 잘 기억해 두라고! 웃어버리면 별거 아니라니까!
오늘따라 백군의 늘어진 츄리닝 바지도, 요가 한다고 바지속으로 구겨넣은 티셔츠도 마냥 천진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