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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또르쟈니 Sep 19. 2019

고추를 말려라

기회를 놓치지 마라

 우리 동네에는  햇빛을 아까워하는 사람이 여럿 산다.  요즘 알고 지내는 사람 중에는  그래서인지  팔월부터 고추를 실에 꿰어 너는 게 유행이다.  실에 꿴 고추를 옷걸이 양끝에 척척 걸친 다음, 베란다에서 4~5일 숙성시킨다. 숙성을 시키는 이유는 아직 덜 익은 고추는 바로 햇빛에  내놓으면 하얗게 바래지기 때문이란다.


 숙성을 마친  고추는 창가에 널기도 하고 발코니 바깥쪽에 내서 널기도 한다.  더러는 옥상을 가진 사람은 햇빛 실한 데서 속성으로 말리기도 한다. 작년부터 알아진 사실인데  옷걸이에  고추를 너는 일은 손이 많이 가질 않고  해서 편리하기 이를 데 없다.  그래서  올해도  그렇게 해봤는데  아쉽게도 고추 꼬다리 부분이  썩기도 하고 늦게 마르기도 했다. 그래서 한 상자 더 사 와서는 거실 탁자를 창가로  겨 널고 집에 있는 채반을  다 동원해서  널어 보았다.


 아침마다 고추가 잘 있나 하고 살피며 뒤집어 주다 보니  다 말랐기에  깨끗이 삶아 말린 행주에 물을 적셔 꼭 짠  다음   닦아내고, 다시 햇빛에 한나절 더 말렸다.  그리고는 단골 방앗간으로 갔다. 고추 조금을 들고 오는 걸 본 아주머니는 "집에서 말리셨나 보네요"  하고 반겨 준다.  쿵쾅 고추 빻는 소리와 함께 매큰한 냄새가 방앗간에 동해서 밖으로 나와 있자니 고추 꼬다리를 따는 할머니가 계신다. "고추가 우리 것보다 작네요.  이건 무슨 고추래요?"  하고 여쮰더니  "아.  이  고추는 조선 고추여요.  맛이 상에 속허요." 그러시면서 방앗간 집 고추꼭지 따주는 일을 계속하신다.

동네 사람 지나가는 이마다 말을 시키면  다 대답을 해 주자니 할머니는 심심치가 않으시겠다 싶다.  그래도 내가 너무 말을 많이 시키면 쓰겠나 싶어 고개를 들어 둘러보니 방앗간 주변이 눈에 다 들어온다.  고추 철이라서인지 보퉁이마다 이름이 다른 고추가 산더미다.


 난 금세 고추박사가 되어갔다.  

쪄서 말린 고추는  한 근에 12,000원

양초는 한 근에 15,000원

청결고추(세척한 고추)는  한 근에  18,000원


 각기 다른 고추를 보고  애초에는 다 빨갛게 익은 고추였을텐데  수확 후 어떻게  다루었는가에 따라서  가격이 전혀 다르게 정해졌다는 게 놀라웠다.  


 그런 정보를  알아내고,  고추를 우선 먹으려고 빻으러 간 사람으로서  시장을 그냥 지나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이번에는  조선 고추 한 상자를 배달시키고야 말았다.  


욕심쟁이!


 하는 김에 청결고추를 만들면  더 좋겠지 하고  정말이지 열심히 어서  채반에 물기를 뺐다.  그런데 이건 뭔가 가을장마님이 일주일을 넘게  추적거리더니 풍까지 불고  그 끄트머리로 또 한차례 장마가 느른거렸다.   그 덕에 애지중지하던  고추가 수난을 겪었다.  조금이라도 무르는가 싶으면 가위로 잘라내어 냉동실에  넣어 둔 것이  반이라면 좀 과한 말이고  하여간 한가득 생겨났다.   


 장마는 물러가고 요사이  하늘에는  새털구름이 바삭이고 바람조차 살랑살랑 불어와서  고추도 덩달아 껍질이 투명해지면서 끄득끄득   말라간다.  그러는 사이 엊그제는 에어컨 실외기를

고쳐 달러 온 아저씨가  실외기 위에 올려진 고추 채반을 보고 내 속까지  개운하게  잘 마르는 것 같다며, 어디서 이리도 실한 고추가 왔느냐고  묻기도  하더라고, 집을 비운  동안 본 아이들이 내게 말해준다.

  그 말을 들었더니 더 신이 나서 자꾸 뒤집어도 주고 하나씩 마른 것은 따로 모아놓기도  하고 재미지다.  


 문득 중학교 들어가서의  일이 생각난다.  그때는 학생이라 해도 알파벳도 잘 익히지  않은 때였다.

신학기에는 어느 학교나 마찬가지겠지만  우리 학교도 환경정리에  관심이 많았다.  큰 일에 속하기도 해서 몇고심한 끝에 당시  오빠들이 보는 작은 잡지인 리더스 다이제스트 놓고 커닝을 하기로 했다.  그 책 아랫단에는 무수히 많은 격언이나 서양 속담들이 들어 있었다.  

그중에서  분에 넘치는 글을 하나 찾아냈다.


해가 있을 때 건초를 말려라.

Make hay while the sun shines.


 아마도 그 안에는 기회를 놓치지 마라  하는 의미가 숨어 있지 않나  고 그것을 택했던 것 같다. 공부를  하는  우리에게  합한 말 같아서  써서 붙여 놓았는데  한 학기 내내 그걸 볼 때마다 뿌듯했었다.  


 그러던 아이가 어른이 되어 이웃 사람들과   잘 지내며 산다.  특히  맛난 음식을 해 놓고  불러주는 아우가 있어  가보니 그 이는  반찬통을 씻어 햇빛에 내 널기도 하고 아주 살림꾼이다.  같이 겸상을 하던 한 언니가 요즘은 해가  좋으니 뭘 내다 널면 좋을까 하고 안절부절못하겠다면서 햇살을 아까워하는 모습이 참 이쁘다.


 고추는 거의 다 말라가고 넓은 탁자며 채반이  조금씩 자리를 비운다.  다 걷어 내면 가을이  점점 깊어지고 잘 마른 고추를 빻아서 김장을 겠지.

 


슬금  뒹구는 낙엽 하나가 구름처럼  아스팔트를 날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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