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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 가족여행 가자.

by 욱근


하루 일과를 끝내고 자취방으로 향하는 길이다. 먹자거리 앞의 버스정류장에서 내린 나는, 골목 안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화려한 네온사인들이 내 눈 가득 들어온다. 연탄에 굽는 막창, 짬뽕과 함께 먹는 양꼬치, 한 접시 이만 원의 광어회. 하지만 모두 내 것이 아님을 알기에 발걸음을 재촉했다. 내방이 있는 골목으로 들어오자 다시금 아스팔트 위에 그림자가 스멀스멀 피어난다. 신문에서는 봄이 왔음을 알리는 매화가 피었다는데 내 주위엔 온통 어둠이 내려앉은 빌라들 뿐이다.


매번 부모님 휴대폰으로만 전화를 걸다 오래간만에 고향집으로 전화를 걸어보았다. 여보세요 하며 누나가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누나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다. “누나” 하며 불러보니 대답이 없길래 전화가 잘 안되나 생각해 “누나, 누나, 누나, 누나, 누나!” 다섯 번쯤 불러댔다. 그러자 “왜…….”라는 짧은 답변이 돌아왔다. 전파가 안 좋은 것은 아닌 듯했다. 누나의 저 짧은 대답에 담긴 깊은 한숨까지도 나에게 고스란히 전해졌기 때문이다. 무슨 일 있냐고 물어보려던 찰나, 누나는 엄마에게 전화를 넘겼다. 엄마는 누나가 지금 탈진 상태 비슷한 것처럼 힘이 없다고 한다.


두 달 전쯤의 일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조별과제를 하고 있던 도중 누나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중에 받으려고 전화기를 잠시 덮어두었지만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믿는 누나가 직접 전화 온 것이 흔치 않은 일이라 친구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잠시 전화를 받으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휴대폰 스피커는 쩌렁쩌렁한 진동을 뿜어내며 누나의 울음소리를 내게 전했다.


상황은 이러하다. 누나는 공무원 수험생이다. 대학교 4학년 때부터 준비했으니 시험공부를 한 지 1년 반 정도 지났을 것이다. 지금 우리 또래의 취업 준비생에게 공무원 시험 준비는 너무나 일반적인 선택이지만, 누나의 공무원 시험 선언은 나에게 충격적이었다. 누나의 꿈은 원래 식품연구원이었다. 경북대학교 식품영양학과를 다니며 4년 장학생 혜택을 받으며 등록금 한 번 내지 않는 대학시절을 보냈다. 연구원이 되기 위해 미국 ‘FDA’ 연구소의 식품연구원까지 경험한 소위 엘리트라고 불리는 사람이었다. 알아주는 지방 국립대로서 경상도 일대 대기업에 안정적인 취업이 보장된 누나가 뜬금없이 공무원을 준비한다니, 사실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도 누나의 결정이니 잘하겠지 생각하며 응원하고 있었는데, 대뜸 이제 와서 더 이상은 못하겠다고 펑펑 우는 것이다.


서럽게 우는 누나를 달래고 차분한 목소리로 물어봤다.

“왜 못하겠는데?”

누나가 말했다.

“독서실에 12시간을 앉아있는데 내가 기계가 된 것 같다. 내가 이걸 왜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제 책만 봐도 토할 것 같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영화배우가 되겠다고 부모님을 설득할 때 썼던 나의 핑계와 대사가 똑같았다. 웃으며 누나에게 말했다.

“누나 그건 고3들이나 하는 핑계 아니가?”

순간 누나가 아무 말이 없었다. 혹시 상처 받은 것은 아닐까 조심스레 되물었다.

“많이 힘드나?”

그러니 다시 꺼이꺼이 울며 하소연을 늘어놓는다.

“그냥 내가 너무 한심하다. 지금 밖에서 다들 시위하는데 ( 국정농단 사건으로 촛불집회를 하던 때이다. ) 나는 여기 앉아서 근현대사나 외우고 있다. 너무 부끄럽다. 그리고 네가 얼마 전에 직접 썼다면서 글 보내줬잖아. 그거 읽는데 나도 모르게 부사, 형용사, 용언 구분하고 있는 내가 너무 싫더라.”

내가 한 번씩 광화문에 다녀왔다고 할 때면, 시간낭비하지 말고 스펙이나 쌓으라고 다그치던 누나였는데, 누나가 이런 말을 하는 게 신기해 피식 웃으며 다시 말했다.

“누나가 예전에는 시위 나가지 말라며.”



누나는 울음을 삼키며 다시 하소연을 시작한다.

“사실 네가 좀 부럽다. 솔직히 공무원 준비하는 거 엄마 아빠 때문도 있거든. 엄마 아빠는 공무원 준비한다고 하면 좋아하잖아. 근데 요새는 너를 더 좋아한다. 맨날 너 하는 거 찾아보고 멋있다고 한다. (나는 부모님의 뜻과 무관하게 내가 하고 싶은 음악, 글쓰기 등을 배우고 있다) 나도 내 하고 싶은 거 하고 싶다.”

“누나 하고 싶은 게 뭔데”

“사회에 좀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래서 사회적 벤처기업 같은 곳에 들어가고 싶다. 찾아보니까 좋은 기업 많더라. 스타트업 기업인데 사람들 생각 바꾸는 콘텐츠 만드는 기업도 있고 또 아니면 유기농 키즈 카페 같은 거 만들어서 애들 돌봐주는 사업 같은 거도 생각 있고 … ”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린 내가 봐도 죄다 뜬구름 잡는 소리뿐이었다. 하지만 나름 진지하게 고민한 듯해 보이는 누나의 담담한 어투에 더 이상 반박할 수 없었다.


몇 초간의 정적이 흐른 후, 다시 누나에게 물었다.

“그럼 애초에 하고 싶은 거 준비하지 왜 공무원 했는데?”

살짝 격앙된 말투로 누나가 말했다.

“내가 미국에 가서 느낀 건데, 미국 사람들은 일이 남아있던 말던 딱 4시가 되면 다 짐 싸서 퇴근하더라. 그 이후는 집에서 가족이랑 보내고 자기 여가시간 갖고. 그게 너무 부럽더라. 그런데 한국에서는 솔직히 그렇게 못하잖아. 회사 들어가면 야근은 기본이고, 결혼하고 애 낳으면 회사 못 나갈게 뻔하잖아. 그래서 회사는 다니기 싫더라. 그리고 연구원도 하고 싶었는데 선배들 말 들어보니까 연구원 들어가면 사람 취급을 안 한데. 그냥 노예 부리듯이 시킨데. 연구소 들어가면 선배, 교수들 비위 다 맞춰야 하고, 마음에 안 들면 수료증도 안 준데.”

속으로 생각했다.

‘무슨 한국이 스위슨 줄 아나.’

그리고 다시 물었다.

“엄마 아빠는 뭐래?”

“엄마 아빠도 내가 너무 힘들어하니까 하고 싶은 거 하래.”

“그럼 이제 누나 하고 싶은 거 하면 되겠네.”라고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이상하게 기분이 언짢았다. 기뻐해야 하는데 말이다. 사실 이 대화의 상대가 학교 선후배였다면 나는 그 사람에게 존경의 박수를 보낼 것이다. 요즘 세대에 안정된 직장을 뒤로하고 사회를 바꾸겠다는 멋진 생각을 가진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가히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친누나였다. 막상 친누나가 그런다고 하니 가슴 한편이 턱턱 막혔다. 그렇다고 딴생각 말고 다시 공부나 하라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또 누나의 꿈을 차마 응원할 수도 없었다. 내가 아는 한 누나가 꿈꾸는 직장은 한국에 없으며 적어도 누나가 죽기 전까지는 우리 사회가 그렇게 바뀌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전화를 건네받은 엄마는 누나가 학원을 다녀와서 힘이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얼마 전부터 다시 공부를 시작하더니 지금은 이제는 아침 7시에 나가 밤 11시에 돌아오는 학원도 다닌다는 것이다. 내가 집에 전화를 했을 때, 누나는 학원을 마치고 집에 온 상태였다. 누나는 한 달간의 방황 후 다시 책상으로 앉았다. 마음이 가벼워지는 듯하면서도 어딘가 불편한 구석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무엇이 꽃다운 청춘 25살 누나를 다시 책상에 앉게 했을까? 무엇 때문에 누나는 책상에 붙은 기계가 되어 16시간 동안 연필을 잡아야 할까?라는 질문이 목 끝까지 차오르지만 나는 누나에게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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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를 끊고 방으로 들어왔다. 방안 가득한 공허함을 달래려 스탠드를 켠다. 말 없는 물고기는 오늘 내내 썼다 지웠다만 반복하다 한 문단도 채우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온 나를 비웃는 듯하다. 난 다시 노트를 폈다. 누군가 읽어줄지도 모를 이 한 문장을 또다시 쓰다 지운다.


누나의 모습이 몇 년 후 나의 모습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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