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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님

이젠 눈이 오지 않습니다

by 천년하루

1.

눈이 오지 않습니다

눈을 기다리는 동안

멍하게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가끔 먼 하늘 위를 날아가는 새와

먼지처럼 보이는 검은 점들이 보입니다

점점


날은 추워지고

하늘이 까매지면

눈이 올까 기대해 봅니다


하얀 눈을 보려면

하늘은 거무스름해야

흰 눈을 꼼꼼히 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가끔 눈이 올 때

하늘을 올려다보면

눈에 눈이 들어와

시원한 눈을 만나게 됩니다


새벽에 눈이 몰래 들어선

어두컴컴한 골목에

조금씩 쌓이는 눈을

싸리 빗자루로 쓸 때


이마 위에선 모락모락 김이나

머리 주변에 흰 아지랑이가

나를 감싸 안고 흰 눈을 맞이합니다


어느새 날이 환해지면

내가 그려놓은 골목 눈 치운 길에도

백설기 위에 살포시 올려진

흰 가루처럼 아주 살며시

눈이 쌓여 다시 쓸까 그냥 놔둘까 고민합니다



2.

예전에는 흙길이어서 살며시 내린 눈을 쓸면

황토 빛깔이 나던 눈 뭉치로 변했는데

지금은 흙길에 검고 딱딱한 바닥과

회색 덩어리가 덮고 있어

황토 눈덩이는 점차 모습을 감추고 있습니다


아침이 되어 밥 먹고 집을 나서면

온 세상은 하얀 망토로 펼쳐진 흰 길에

다소곳이 서있는 신부가 두 발이 흰 드레스를 밟을까

조심조심하고 있는 모습으로 눈 세상을 맞이합니다


눈 세상을 맞대고 입김을 불면

옆집 아궁이 땐 굴뚝처럼

나와 세상이 하나로 연결된 듯

하얀 연기구름이 피어납니다


아무도 밟지 않고

처음 지나가는 길은

상상만 해도

눈과 하나 된 기분입니다


소복이 쌓인 눈에 첫 발을 디디면

사각사각 소리를 느끼며

뒤꿈치를 먼저 눈에 닿게 하고

하늘 향해 높이든 발 머리를 살며시 내려놓으면서

눈과 마주하고 싶습니다


대면한 작은 소리에

마음은 차분해지고

나와 눈이 하나가 된 듯한

상상을 펼치게 됩니다


그때가 되면 가만히 감히 가지 못하고

두 손으로 눈을 꼭꼭 모아 단단하게 만든 다음

손이 닿지 않은 곳으로 눈 뭉치를 꼭 던져봅니다



3.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신발 옆면으로

눈을 긁어모아

작은 산을 일으키고

두 발을 조금씩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미끄럼틀을 만들어

슬로프에서 스키 타듯

미끄러움을 만끽해 봅니다


버스가 오면

얼음골 손님이 삐끗할까 걱정되어

신발 머리로 산 중턱을 까고

뒤꿈치로 산 밑동을 떼어낸 뒤

덩이를 정류소 밖으로 차버립니다


버스 계단에 올라서면

흰 산과 흰 들판을 바라봅니다

흰 눈을 대할 때면 문득문득

옛 기억들은 눈송이 안에 펼쳐집니다


버스에 내려 집으로 달려가다

아침 얼음산에 걸려 고꾸라집니다

한숨 자고 일어났는데

눈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젠 눈을 뜰 수 없지만

컴컴한 하늘에서

차가운 덩이가 떨어질 때면

눈과 함께한 순간이 하얗게 펼쳐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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