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연구간호사가 될 상인가!
기본적인 업무들이 익숙해지자 호기심이 많고 뭐든 제대로 알고자 하는 욕심이 있는 나에게 연구간호사의 현재와 미래가치에 대한 탐색이 시작되었다. 나도 처음 시작은 매일 발바닥에 땀나게 뛰어다니던 임상에서 뭔가 여유가 있어 보이고 지적이기까지 한 ‘임상연구’라는 단어가 매력적이었지만, 뭐든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 하지 않던가!
실제 경험해 본 연구간호사의 현실을 점차 알아가기 시작했다. 임상연구라는 것은 당장 결과를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 결과조차 유의미한지 알 수 없음에도 시작하는 것이기에 투자의 성격이 짙다. 그러다 보니 다국적기업의 제약회사를 포함하는 연구들은 비용도 넉넉하고 전 세계의 여러 병원이 참여하여 수많은 인종과 인구를 대상으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모든 연구가 다 그럴 수는 없듯이 우리나라 안에서 몇몇 대형병원이 힘을 모아 하는 연구도 있고, 내가 근무하던 병원은 암환자를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곳이었기에 단일기관으로서 연구하는 주제들도 있었다. 매년 성과를 내야 하고 그 성과도 객관적이면서도 주관적인 성과로 측정해야 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비용을 아껴가며 사람을 쓰는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나라는 경쟁이 심하고 사람의 인력을 값싸게 여기는 나라이기에 선진국에서 받는 대우를 누리기란 여간 쉽지 않다는 것을 일하며 알게 되었다. 다만, 중증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온 환자분께 새로운 치료를 시도해 보고 그 천문학적인 비용을 청구하지 않는 조건으로 연구에 참여하기에 어떤 면에서는 서로 윈-윈의 관계가 되기도 한다. 기존의 치료에서는 좋은 결과를 보지 못했거나, 이미 표준치료를 할 만큼 해서 개인의 돈을 수백, 수천만 원씩 써야 하는 상태의 환자분들께는 털끝 같은 희망이 될 수도 있기에 연구에 참여를 제안하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환자가 참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정된 조건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미리 확인하고 가능성이 확실한 경우에만 의사를 묻기 때문에 연구의 목적과 진행내용에 대한 정확한 숙지가 매우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작은 실수로 인해 잘못된 정보를 제공할 수도 있고 이에 따라 때로는 금전적인, 감정적인 손실을 얻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구를 담당하는 사람은 적어도 자신이 진행하는 연구에 대해 관심이 있고 여러 가지 조건사이에 맹점은 없는지, 문제의 소지가 있는지 항상 예의주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요소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내가 이 업무를 4년이 가까운 시간 동안 해낼 수 있었던 이유가 몇 가지
있다.
첫 번째로, 9-5 근무시간으로 출퇴근에 대한 부담이 없었고 공휴일과 토요일을 다 쉬었기 때문에 체력적인 소모를 겪지 않았다. 점심시간도 지킬 수 있고 모처럼 회사원으로 지냈던 시절을 다시금 누릴 수 있었던 것이 간호사가 된 이후에 가장 큰 장점이었다.
두 번째로, 내가 해야 하는 업무를 완벽하게 해 놓으면 나의 시간을 활용할 수 있었다. 미리 정해진 스케줄은 그에 따라 준비하고 대비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업무의 경중에 따라 내가 스스로 스케줄을 짜고 자율적으로 업무를 할 수 있는 환경이 나에게는 매우 좋은 조건이었다. 물론 바쁜 시즌에는 워라밸도 없거니와 화장실 갈 여유도 없이 종일 매달려 일하는 날도 있었지만 그런 날보다는 내가 하루, 한주, 한 달, 한 분기, 일 년을 계획하고 수정할 수 있었기에 내가 주도하는 업무를 한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세 번째로, 결혼을 하고 출산을 하더라도 업무조정을 통해 얼마든지 일을 계속할 수 있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출산휴가를 지원받는 선생님의 이야기도 들었기에 오랫동안 일할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실제로 내가 처음 그곳에서 일한 지는 어느덧 10년이 가깝지만 그때 함께 일했던 분들 중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선생님이 여럿이다. 어쩌면 내가 미국에 가려고 마음먹지 않았더라면 나 역시 그분들처럼 오랫동안 한 직장에서 경험을 쌓았을 것 같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해외 의료기관과의 연구를 하면서 새로운 연구트렌드와 시각을 배울 수 있었고 해외학회 참석등의 기회가 있다. 나는 해외기관연구를 전담하면서 연구비로 지원을 받고 미국으로 학회에 참석하는 기회를 가지기도 했다. 마침 남편도 회사에 휴가를 신청할 수 있어서 함께 다녀왔는데 이전부터 외국에 나가면서 해외살이에 대한 긍정적인 의견을 가진 데다가 미국이라는 나라를 실제로 가보니 한 번쯤 살아보고 싶었다는 이야기를 해서 아마 계속 일했더라면 주기적으로 남편과 미국을 다녀왔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이 단점도 존재한다는 것을 다들 알 것이다. 그래서 이 좋은 조건들에도 불구하고 내가 왜 연구간호사를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는지 이어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