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하는 간호사!
새로운 분야에서 일하는 것은 모든 것이 낯설어 두렵기도 하지만 그만큼 신기하고 흥미진진한 부분도 있기 마련이다. 적어도 나에겐 그랬다. 간호사가 참여하는 연구라니!
하지만 나의 연봉을 방망이 깎는 노인처럼 깎아놓은 상태에서 일하러 들어갔음에도 놀랄 일은 더 있었다. 내 전임자는 이미 그만둔 지 한 달도 더 되었고 그 전임자의 전임자는 공금횡령(?)에 업무태만을 숨기고 이직하며 퇴사하는 바람에 그 사실을 모르고 온 전임자 역시 줄행랑을 치고 결국 초토화가 되어있었다. 게다가 임상연구라는 게 뭔지 배우기도 전에 일종의 내부감사기간에 걸려서 감사를 진행하는 부서의 담당 선생님께 하루에도 몇 번씩 물어가며 감사하게(?) 업무를 허겁지겁 배우기 시작했다.
거의 6개월 이상의 데이터가 작성되지 않은 백지상태로 겉표지만 남아있었고 프로토콜이 뭔지, CRF가 뭔지도 모르는 햇병아리 연구간호사는 매일매일 챌린지 속에서 살아남아야만 했다. 옆자리에 다른 연구를 하는 선생님이 계셨지만, 임상연구를 진행하는 건 담당만이 아는 일이라서 전반적인 공통업무정도만 알려달라고 부탁해서 배우고 나머지 나에게 주어진 연구는 어떻게든 이어나가야만 했다.
그렇게 꼬박 3개월을 주 5일 근무지만 금요일은 밤 10-11시까지, 때로는 막차를 탈 시간까지 혼자남아서 공부를 했다. 그러고도 뭔가 찜찜하고 시원치 않으면 토요일도 출근해서 오전시간만이라도 조용하게 업무를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내가 뭔지 정확히 알아야만 앞으로도 일할 수 있다고 느꼈기 때문에 초라한 급여에 연연하지 않고 나의 능력을 키워보겠다는 마음을 가졌다.
그러자 3개월이 지나고 업무가 안정되는 것이 보였다. 드디어 내가 임상연구라는 것을 어느 정도는 설명할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이 되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뜨거운 여름이었다. 하하
일이 손에 잡히자 새로운 연구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특히 해외기관연구를 전적으로 내가 전담하게 되면서 숫자에 약했던 내가 억지로 맡았던 연구비관리는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티 내면서 일하는 스타일은 아니기에 내가 연구를 담당하던 책임연구자인 의사(PI) 선생님은 모르시는 줄 알았지만 내가 느낀 것보다 더 빨리 업무가 자리 잡는 걸 아셨다고 해서 뭔가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일을 열심히 하고 그만큼 성장함을 느끼면서 나는 그 자리에 계속 머무르는 건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뭘 하면 좋을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안 하던 운동을 시작했고-수영을 3년간 배웠다- 미국간호사 면허시험에 응시하기로 결심했다. 현재는 온라인으로 지원서류나 업무가 많이 업그레이드되었지만 내가 준비하던 2015년에는 접수비도 은행에서 체크를 발행해서 동봉해야 했고 모든 서류를 우편으로 보내야만 했다. 대행업체를 쓸 수도 있었지만 그 정도는 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만큼 영어에도 조금은 친숙해졌다. 그렇게 일과 공부를 병행하면서 미국을 가고 싶다는 나의 꿈이 조금씩 커져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