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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국간호사 Sophia Mar 25. 2024

한국 병원 근무 경험기 - 1-1

A병원 - 전담간호사(PA)

드디어 간호사가 되었고 발령받은 부서는 생전 처음 들어본 곳이라서 내가 좋은 부서로 가는 건지 아닌 건지를 가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입사대기는 대학졸업 후 10개월 동안 아무 연락도 없이 기다리게 하더니 막상 연락이 와서는 당장 출근여부를 결정해야 한다고 했다. 입사할 부서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줄 수 없는지 물으니 내일 연락을 다시 줄 테니 그때까지 결정해서 말해줘야 한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의 신입들은 을 중의 을이었다. 고용주가 하라면 하고, 가라면 가야 하는 것이지 내가 원하는 부서 따위를 배려해 주는 대상이 아니었다. 그럴 거면 원티드(부서신청)는 왜 2 지망까지 쓰라고 한 걸까...

아무튼 발등에 불이 떨어지고 나니 간호사인 지인들을 붙들고 도대체 나에게 결정하라고 한 업무가 뭔지 알아보기나 해야 했다.


PA. 전담간호사라고 불렸던 직종의 업무는 쉽게 말해서 전공의인 레지던트가 하는 일을 대신하는 것이었다. 병원이 돌아가는 상황을 모르는 초짜에게는 맡기지 않는 편이라서 의외라고 했지만 교대가 아닌 형태로 주 5일을 근무하고 빨간 날에도 쉬기 때문에 워라밸을 지키기엔 좋은 업무일 거라 했다. 대부분의 간호사들은 병동에 배정을 받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3교대근무가 필수이고 그래서 어느 정도 경력이 쌓이고 나이가 들면 외래업무와 같은 9-5, 주 5일의 생활을 꿈꾼다고 했다. 그래서 자기들도 자세한 업무는 모르지만 괜찮은 근무조건일 거라고 입을 모았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이미 제법 나이가 들어 간호사가 되었으니 너무 힘들게 교대를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원래 내가 지원했던 부서는 수술실이었는데 PA를 하게 되면 수술실에서 일하는 시간이 많아서 수술실간호사의 업무도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여러모로 나에겐 기회인 것 같아서 다음날 병원 간호부에서 온 전화에 하겠다고 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나의 첫 근무일자가 정해졌다.


오리엔테이션을 가서 나를 포함한 5명의 동기를 만나게 되었다. 그때는 몰랐지 우리가 앞으로 얼마나 고생하며 일하게 될지.. 그래도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했고 어쩌면 나도 동기가 있으니 든든할 것이라 기대했다. 물론 그 동기들은 여전히 지금도 연락하며 지내고 다들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중이다.


지금은 뉴스와 여러 가지 채널을 통해서도 의사의 업무를 대신하는 PA간호사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일을 시작했던 2012년도만 해도 그 일을 하는 사람은 있지만 그들이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는 모르는 경우가 더 많던 때였다. 나 역시 해야 한다니 하고 배워야 한다니 배워가며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힘들었던 그 당시를 그나마 젊음으로 버텼다고 본다. 나는 일반외과에서 일을 했는데 아침 7시 30분까지 출근을 하면 의국모임을 하면서 그날 있을 수술이나 일정, 또는 케이스 스터디를 했고 담당의사(교수급)의 외래, 병동, 수술 등 일정에 따라 진행을 돕고 서포트를 하는 업무를 했다. 대부분의 업무는 그래도 5시 이전에는 끝이 났지만 점점 여러 업무가 많아지면서 7시 이전에는 퇴근하기 어려웠던 기억이 난다. 일반외과는 여러 분과가 있는데 나는 유방암환자를 진단하고 수술, 항암, 추적관찰하는 업무를 맡았다. 물론 대부분 간호사가 해야 하는 일은 아니었지만 이 병에 대해 참 많은 것을 이해하고 배우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일반외과에서 세부분과로 담당이 나뉘었을 뿐 전체적으로 의국에서 맡은 일도 있었기 때문에 한 달에 두 번은 업무가 끝나고 밤새 응급수술 연락을 기다리는 콜당직을 섰는데 이때는 내가 속한 분과에서는 하지 않는 외상환자나 이식수술등에도 참여하여 유방외과 전담간호사로서는 쉽게 알기 힘든 경험도 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일복 많은 내가 싫을 정도였지만 돌이켜보면 그만큼 내공이 생긴 것 같다.


그간 일하며 많은 환자분과 보호자를 만났고 그만큼 기억에 남는 일들도 많이 있지만, 지금까지도 가끔씩,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어느 일요일 당직을 서다가 콜을 받았는데 20대 초반의 남성이 뇌사판정을 받고 장기이식을 진행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당시에는 장기이식코디네이터라는 직업도 매우 귀했는데, 그분들이 속한 장기이식위원회에서 결정된 내용에 따라 우리 병원에서 1순위로 이식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간절한 장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는 콜을 받았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드라마에서나 보던 이야기를 내가 실제로 듣는구나.. 하며 매우 신기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곤 앰뷸런스를 타고 근처 대학병원에 모여 수술에 참여하게 되었다. 장기이식은 예고 없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소위 서울의 빅 5 병원에서도 기차와 비행기를 타고 속속 의료진들이 도착했고 정말 많은 인원의 의논을 거쳐 결정된 순서에 따라 장기적출수술을 시작했다. 수술이 시작되기 전 어린 청춘을 향해 묵념과 기도로 시작하던 그날의 모습은 한 생명의 고귀함을 느낄 수 있는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이식팀들의 손발이 척척 맞는 광경을 보는 것 또한 그랬다. 어떤 이는 자신의 인생을 허무하게 끝내기도 하지만, 또 어떤 이는 자신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날까지 누군가를 돕고 희생함을 목격했다.


의료인이기에 볼 수 있던 현장이었고 그때의 분위기와 느낌은 여전히 생생하다. 그래서 종종 나의 일상이 힘겹고 무의미하다고 느껴지는 우울한 상황이 되면 삶과 죽음 사이에서 남을 위한 숭고한 선택을 했던 멋진 청년을 떠올리며 나의 게으름을 토닥여 매 순간을 감사하며 살도록 다독이게 하는 도구로 삼고 있다.


우리 환자에게 필요했던 장기를 적출하기 위해 나도 수술에 참여했고, 다시 우리 병원 수술실에서 준비하고 있던 공여자에게 장기를 이식하는 것까지 꼬박 15시간이 흘렀다. 이쯤 되면 잠은 정신력으로 버티는 수준이었지만 결국 날이 새고 해가 밝아오면서 수술은 무사히 마쳤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 환자를 중환자실로 보내면서 비몽사몽 간의 월요일을 맞이했다.

그러자 이때부터는 감동보다는 피곤이 몰려왔다. 눈을 뜨고는 있지만 감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상태로 월요일 오전 진료를 감당해야 했다. 어찌어찌 오전이 지나갔고 오후수술은 우리 팀의 다른 선생님이 대신해서 맡아주신 덕분에 나는 빈 병원침대에 쓰러지듯 기절해 쪽잠을 청했다.


개인적으로는 너무 힘든 시간이었지만 그만큼 강렬한 기억과 뒤늦게 밀려오는 뿌듯함을 느끼면서 내가 적어도 간호사가 된 것을 좋아하는구나. 힘들어도 보람된 일을 하는 것이 나의 성향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그때와 같은 극한상황에서 일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때처럼 내가 일해야 한다면 아주 가끔은, 지금의 저질체력으로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정치와 종교에는 말을 아끼는 나이지만, 아직 세상에는 환자를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물불 가리지 않는 의사와 간호사가 있다는 말을 남기고 싶었고, 적어도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만큼의 보상과 대우가 따랐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리고 이런 경험을 간직한 채 나의 첫 병원과는 이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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