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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nia Oct 04. 2023

너를 만나서 사람이 되었어

지난 시간이 헛되지 않았음에 감사합니다


너를 만나서 사람이 되었어


그는 나에게 말을 해주었습니다.

위안이 됩니다.

흘려버린 잃어버린 시간은 아니었겠죠.

최고는 아니지만 최선을 다한 시간이기에 후회나 미련은 없어요. 다만 그 시간 속에 나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다행히도 누군가에겐 귀한 시간이었어요.


그분을 처음 뵈었을 때 아니 그 집을 방문했을 때 정말이지 내가 다시 이런 환경을 겪게 되는구나 싶어서 모든 것을 없던 일로 하고 싶었습니다. 선택과 결정이 늦은 나는 그로부터 꽤 오랜 시간 동안 가족이라는 인연으로 맺어집니다.


그가 해야 할 일들은 내 차지였습니다. 효도라는 것을 말로만 하는 그에게 해준 말이 있습니다.

“건강하게 내 곁에 안녕히 계실 때 잘해드려라. 가시고 나서 제사 지내고 봉분 훌륭하게 만들면 뭐 할 거냐. 당장 자식과 먹는 한 끼의 밥상이 소중한 걸~ 자식이 넌지시 건네는 용돈이 따뜻하고, 자식의 든든한 어깨에 마음 놓으실 텐데~”


사실 내게 미루는 그의 효성을 다시 돌려주고자 한 말이었는데 효과는 한참 뒤에 나옵니다. 거동이 편치 않은 그분과 함께 병원이라도 가려면 꽤 머리가 아픕니다. 병원 한번 다녀오면 하루의 시간과 나의 체력이 소진되기에 그분이 방문해야 하는 3차 병원의 여러 과를 하루에 몰아서 방문하는 스케줄로 짜야했습니다.

그녀는 말이 거의 없으신 분입니다. 청력이 약하다 보니 대화가 쉽지 않고, 자신은 말씀을 하셔도 상대의 말을 제대로 들으실 수 없으니 점차 입을 닫으셨어요. 그러다 보니 말하는 것도 힘들어하시더군요.

나중에는 손과 표정으로만 슬쩍 의사표현을 하셨어요. 피가 섞이지 않은 분이지만 최선을 다할 수 있었던 것은 누구의 어머니가 아니라 오로지 나만을 의지하는 그녀의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내 마음에 잘해드린 것은 하나도 없는 것 같아서 늘 미안해도 그녀의 시선은 늘 나에게 향해 있었고, 가진 것이 없어 내어 주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나는 그분의 손이고 발이었고, 그녀의 충실한 비서였을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그가 옆에서 바라보았죠. 그래도 본인은 전혀 할 의지가 없었어요. 

"난 원래 이런 거 못해. 넌 잘하잖아~"

"난 처음부터 잘했냐? 모르는 것 투성인데... 그래도 해야 하니까 물어보면서 알아가는 거지~"

"그래도 난 못하겠어"

이해할 수가 없었죠. 자신의 어머니인데 왜 못한다고만 하는지에 대해서. 개인정보 보호법이 강화되면서 예전에는 대리인이 쉽게 대신하던 것을 전혀 함부로 할 수가 없는 세상이 되었을 때 가장 당황하고 가장 불편해 한 사람이 그 입니다. 왜 안 되냐고 우기는 것을 오랫동안 이해시키고 설득하다가 알았습니다. 하기 싫어서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자신이 불편한 것을 극도로 받아들이지 않는 그에게 헤어짐을 선포하고서야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라는 프로그램을 좋아합니다. 수없이 많은 사례마다 적합한 해결방안을 제시하는 오은영 박사의 통찰에 감탄합니다. 그의 어린 시절은 솔루션이 필요한 시기였고, 그것을 받지 못한 채 막무가내로 성장한 고집불통이고, 안하무인(가장 가까운 가족에게)으로 성장한 것 같습니다. 사회적으로는 아주 좋은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누군가가 항상 24시간 비서역할을 대행해 줄 사람이 있었거나,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해 왔을 터인 것 같았어요. 그것이 통하지 않는 상황이 되었을 때도 필자라는 역할자를 찾아낸 그가 참 대단하다고 생각해 줍니다. 


그는 내 말을 실천하기 시작합니다. 주 3회 이상 때론 주 5회도 찾아뵙고 밥 먹습니다. 건강하실 때는 함께 외식도 하러 가고는 했죠. 코로나가 시작된 그 해 4월에 폐렴으로 입원하게 됩니다. 그녀의 건강은 급속도록 나빠졌고, 3개월간 대학병원, 종합병원, 요양병원을 거쳐 집으로 돌아옵니다. 경제적 이유로 요양원에 들어가시길 바랐던 나는 참 나쁜 사람인 듯하여 마음이 아팠습니다. 고령의 노인에게 가장 좋은 시설은 자기 집이라는 것을 잘 알지만 가족은 힘겨운 싸움이 시작되기에 갈등이 많았어요. 3년 정도 가정 내 요양을 하신 끝에 결국 영면에 드셨습니다. 그때부터 간병인이 함께 해주어서 나의 체력이 소모될 일은 생기지 않았지만 통장이 비어 가는 속도는 상당히 빠르더군요. 통장이 비는 속도에 맞춰서 나의 지침도 비례합니다. 마음은 아니어도 현실은 냉혹하니까요. 


어느 날 그분은 식사를 거의 안 하시기 시작했어요. 어떻게 설득해도 입을 닫으실 때 문득 떠오른 것은 자식이 경제적으로 힘들까 봐 걱정하시는구나 싶었어요. 그래서 목돈이 들어 있는 통장을 손에 올려드렸습니다. 그제야 웃음을 되찾으셨어요. 아마도 본인이 아픈 것이 자식을 더 힘들게 한다는 자괴감으로 그러셨던 것 같습니다. 통장의 금액으로 병시중과 간병인 비용 등을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신 것 같습니다. 


그때부터 그의 효도는 시작된 듯합니다. 이틀에 한번 꼴로 뵙고 오고 작은 용돈이라도 틈틈이 쥐어드리고 옵니다. "엄마 예뻐요~"라며 말도 건넵니다. 어머니의 다리도 주물러 드리고 옵니다. 무뚝뚝한 아들의 지극한 효성을 다 받으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영면에 들어서 납골당에 모셨습니다. 그에게 말해주었습니다.

"남편에게 못 받은 사랑, 아들에게 다 받았을 거야~ 무뚝뚝하고 어려운 아들의 사랑을 가득 받으셔서 과거의 힘든 기억은 모두 바꾸셨을 거라고 생각해. 그래서 가장 행복한 마음 안고 가셨을 거야.. 당신은 최선을 다했어~"

"그럴까?"

.

.

.


추석 전에 그분이 계신 곳을 다녀왔습니다. 

젊을 때 예뻤을 때의 사진이면 더 좋았겠지만 그래도 환히 웃고 계신 사진을 보니 그분의 손길이 떠오릅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내게 말합니다.

"너를 만나 내가 사람이 되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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