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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킬번댁 Oct 23. 2021

바람 잘날 없는 우리 집. ​이번엔 아빠다.

엄마의 '황혼 이혼'을 향한 뜨거운 혁명의 불꽃은 호랑이 아빠의 이가 빠지면서 좌절되고 말았다. 하지만 혁명을 성공시키지 못했을 뿐 포기한 것은 아니었기에 엄마의 궁극적 목표인 '황혼 이혼을 향한 열정'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어느 날은 반찬 투정하는 남편에게 "그럼 나가서 사 먹어!!"라며 쿨내 나는 한 방을 던지기도 하고 티브이만 끼고 있는 남편에게 "그렇게 빈둥거릴 거면 청소기라도 밀던가!!"라는 당찬 요구를 하기도 했다. 가끔 아빠의 '니 엄마 말이다!'로 시작되는 고자질을 듣다 보면 그동안 보지 못한 엄마의 강한 모습이 낯설고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환갑을 앞두고 겨우 쟁취한 엄마의 독립이니 아빠에겐 미안하지만 난 엄마를 응원하기로 했다.


엄마는'뜨개질이나 할 것'이라는 아빠의 예상과는 달리 '그림 그리는 할머니'라는 꿈을 향해 비상했다. 늦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손주들이 다니는 미술학원에 등록 했고, 젊은 사람 못지않은 열정으로 아이들과 함께 그림을 배웠다. 손주들은 학원에서 만나는 할머니에게 깊은 공감대와 동질감을 느꼈고 할머니를 향한 손주들의 팬심은 날이 갈수록 깊어졌다. 마침내 손주들의 인기를 등에 업은 엄마는 우리 집의 새로운 실세로 등극하게 되었고 그렇게 '아빠가 호령하던 시대'는 아쉽지만(?) 저물고 말았다.


엄마의 인기가 날이 갈수록 높아지기 시작하자 아빠는 묘한 패배감에 시달리는 듯했다. 그렇게 집안의 기류가 전과는 다르게 엄마를 중심으로 흘러가자 아빠는 조금은 외롭게, 또는 치사하게 엄마를 질투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새롭게 바뀐 집안의 실세에게 핀잔을 받고 주눅이 든 아빠가 내게 물었다."너 삼식이가 뭔지 아냐?" 당시 삼식이라는 단어가 방송 여기저기서 유행어처럼 나오던 시절. 그 뜻을 모를 리 없던 나는 아빠의 질문 의도가 엄마를 난처하게 만들 핑계란 걸 알기에 대답을 피했다. 못 들은 척 넘어가려던 그때였다. "하루 세끼 와이프한테 밥 달라고 진상 부리는 사람을 삼식이라고 한단다." 라며 내 의도를 알아채기라도 한 듯 아빠가 먼저 대답을 하는게아닌가. 그리고는 엄마를 한 번 흘깃 보더니 "이놈의 삼식이가 자꾸 밥타령만 하니까 부인들이 넌덜머리가 나서 아침만 차려주고 도망치듯 밖으로 나간다는데 그 얘길 들으니까 내가 딱 삼식이지 뭐냐."라며 고개를 숙이는 게 아닌가.... 난 그만 소리 내서 웃고 말았다.

"하하하!! 아빠! 아빠가 설마 삼식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말도 안 돼..... 하하하!"


아빠처럼 호령만 하고 지낸 사람이 갑자기 삼식이 운운하며 안타까움 가득한 말투로 자기 연민에 빠진다는 게 솔직히 이해가 안 됐고 더불어 불쌍한 표정을 짓는 아빠가 귀엽기도 해 웃음이 났다.


"아빠! 삼식이라는 단어가 회사 다닐 때는 돈 번다는 이유로 가족들한테 큰소리치고 살다가 은퇴하고 더 이상 큰소리칠 수 없는 꼰대들이 만들어낸 말 아니야? 그런데 그건 자격지심인 거지. 돈 좀 번다고 어깨에 힘주고 가족들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놓고 이제 와서 나 좀 봐달라고 하는 무책임한 아버지들이나 듣는 말을 왜 아빠가 해?"


"아빤 아니지. 삼시 세 끼 밥 잘 차려주고 주안상 까지 봐주는 부인도 있고, 아빠 심심할까 봐 자주 들여다보는 딸들도 있고, 할아버지 보고 싶다는 손주들도 있는데 아빠 너무 호강에 겨우셨는데? 아빠 같은 상위층 삼식이가 어디 있어. 자기 비하야 이건."


어랏? 말을 하긴 했는데 아빠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 아빠는 나를 바라보며 눈빛으로 대답한다.


'너 말 한번 잘했다. 그 민폐나 끼치는 사람이 바로 나 아니고 누구냐!'



아침 먹은 지 얼마 안 지났는데 벌써 배가 고프고, 그렇다고 뭐 하나 내 손으로 직접 해 먹지는 못하니 바쁜 마누라 뒤만 졸졸 따라다니는 사람. 자식들 바쁜데 전화해서 쓸모없는 주변 얘기로 시간을 뺏는 사람. 돈 벌어 당당하던 예전 그 시절이 자꾸 그리운 사람. 외출하는 부인을 멀뚱히 바라보며 쓸쓸해하는 그런 사람. 삼식이가 뭐 별건가? 그게 삼식이지. 그러고 보니 지금 삼식이가 아니라 우리 아빠 얘길 하고 있는 거잖아.. 아니... 우리 아빠가 딱 삼식인 거잖아. 그때였다. '아차!! 걸려들었구나!!'


우리 아빠는 삼식이가 아니여야만 했다. 왜냐고? 그동안 집안에서 군림하던 시간이 너무 길었기 때문에 잠깐이라도 엄마에게 권력이 돌아가는 게 공평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아빠의 질문 의도를 알면서도 요리조리 대답을 회피한 것인데. 아빠의 마수에 걸려들었다. 딸들의 동정심을 얻으려는 아빠의 고난도 계획임을 잘 알면서도, 난 결국 아빠의 의도를 피하지 못하고 미끼를 덥석 물어 버린 거다.


"그래서 말이다. 아빠는 가끔 인생이 서럽다고 느껴진다."


아니 이건 또 무슨 환장할레이션 이란 말인가.... 잔잔한 저수지 바닥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 안을 들여다보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모르는 법. 평화로운 표면과는 다르게 아빠의 마음속엔 물보라가 일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이번엔 아빠다. 아빠의 폭주가 시작된 것이다.  


노년기에 접어든 두 분의 질풍노도의 시기는 대체 언제 끝나는 걸까? 우리 집은 가지 많은 나무도 아닌데 어째서 바람 잘 날이 없는 걸까? 뭔가 삶을 뒤흔들 결정이 필요한 걸까?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할 즈음... 아빠가 말한다.


"딸아.. 우리 같이 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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