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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킬번댁 Oct 23. 2021

우리 집에 아들이 없는 이유.

혼 후 딸 둘을 낳은 부모님의 별명은 '딸딸이' 였다고 한다.

아들 선호 사상이 여전했던 80년대, 딸 일곱을 낳고도 아들을 낳기 위해 애쓰는 게 이상하지 않은 시대였으니 아들 없이 딸 둘만 낳고 출산 포기를 외친 부모님이 놀림을 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지금에 와서야 세상의 시선에 맞선 (시어머니의 아들 타령에 대항하는) 두 분의 결정이 당차다 해석되겠지만 그 당시엔 미련하고 대책 없는 결정이었다고 한다. 특히 아들만 둘 (씩이나) 낳은 셋째 큰엄마가 걱정을 가장한 놀림을 제일 많이 했다고 하는데.


당시 내 나이 여섯 살. 벌써 30년이 넘게 지났음에도 여전히 셋째 큰엄마의 단골 멘트(상처 멘트)가 기억나는 거 보면 걱정도 어지간히 깊게 하셨나 보다.


"야~ 넷째야. 너는 제삿밥 차려줄 아들도 없는데 뭘 그렇게 힘들게 오고 그러냐!"


" 딸들은 시집가면 그만인데 넷째야 너 나이 들어 외로워서 어떡하냐~"


난 셋째 큰엄마가 목과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목소리로 아들 없음에 대한 비아냥을 농담처럼 말할 때마다 마치 그 이유가 나 때문인 것 같아 부모님께 죄송했었다.


내가 딸로 태어나는 바람에 죄 없는 엄마, 아빠가 저런 소리를 듣는 게 아닐까, 만약 내가 아들이었다면 어땠을까. 근본 없이 굴러온 자격지심은 내 자존감을 떨어트리기 충분했고 그 뒤로 나는 '아들 같은 딸, 아들 몫까지 해내는 딸' 이 되기 위해 스스로를 채찍질했었다.


정작 엄마는 혹여 당신 딸들이 아들로 태어나지 못함을 부끄러워할까 딸들의 눈을 마주치며 단호한 목소리로


"저런 말에 신경 쓰지 말고, 여자라고 기죽고 살면 안 돼. 인간답고 훌륭히 사는 데는 결코 성별이 중요한 게 아니야. "


"어머! 형님! 딸도 아들 못지않게 훌륭히 키우면 되지 아들 없다고 대우 못 받는 거 아니에요. 아들이 무슨 죄라고, 아들 덕에 인생 필 생각을 하고 그러세요? 두고 봐요. 우리 애들이 커서 살게 되는 세상은 아들보다 딸들이 더 잘 나갈 테니까요"


라고 힘주어 말했지만 어째서인지 난 엄마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딸로서의 자존감을 키울 수가 없었다.


그런데 말이지. 30년이 지난 지금. 상황은 대역전의 결말을 맞고 말았다. 엄마의 말이 진짜가 되어 딸이 비행기를 태워주는 시대가 오고 만 것이다. 


그렇다고 아들을 선호하는 사상이 흩어 사라지진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태아 성별 검사에서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축하드립니다 공주님이네요.'라는 소리를 들으면 더 이상 눈물을 쏟지 않는다고 하니, 청천이 개벽하였지 뭔가. 이젠 딸만 둘 이래도 놀림받지 않는 세상이 된 것이다. 그런데도 가끔은 내 안의 무언가가 '그래도 넌 아들 노릇을 해야 하니 듬직해야 해'라고 속삭였다. 던져버릴 수 없는 숙명 같은 아들 노릇을 해야 하는 딸.


그런데 이번 여행에서 '우리 집에 아들이 없는 진짜 이유'를 알게 된 뒤 마침내 지긋지긋한 '아들 같은 딸'의 굴레를 벗어 날 수 있었다. 속 시원하게 홀딱 벗겨낼 진실을 알아버리고 말았다.


하이델 베르크에서 스페인 바르셀로나까지는 악명 높은 '라이언 에어'를 타기로 했다. 연착을 밥먹듯이 하는, 그러면서도 단 1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뻔뻔한 비행기를 타기 위해선 하이델 베르크 중앙역에서 출발하는 공항버스를 타고 'HAN(한)' 공항을 향해야 한다.


서둘러 호텔 체크 아웃을 마치고 중앙 역을 향해 가던 중 우린 거짓말 같은 일들을 겪게 되었다.


엄마의 말을 빌려 그렇게 조심하라 당부했건만 결국 가방 하나를 해 드신 아빠 덕분에 수화물 캐리어의 바퀴 하나가 박살이 났고, 마른하늘에 뜬금없이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30분을 걸었고, 아빠에게 잠시나마 버림을 받았다.


갑자기 쏟아진 비 때문에 혹여 손녀딸 감기 걸릴까 봐 '손녀딸만 들고' ' 부인은 버린 채' 먼저 비를 피한 게 이유였었는데, 아빠 대신 고장 난 가방을 힘들게 끌고 온 엄마로서는 남편에게 대 놓고 배신을 당한 상황이었어서 공항을 이동하는 내내 분위기는 살벌했다.


분하고 원통한 엄마가 만든 최신 노래인 '나쁜 영감 탱구'를 반복해 들으며 공항으로 가던 중 어째서 우리는 보통의 사람들처럼 조용하고 단순한 여행이 불가능한 것일까에 대해 생각해 봤다.

여행이 이런 것인지, 우리만 이런 것인지 알 길이 없었지만 어찌 되었든 큰 탈 없이 독일 일정을 마무리 짓고 드디어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가게 되다니 우선  감사부터 하기로 했다.

고된 인생의 무게와도 같았던 바퀴 세 개 달린 30킬로 짐가방을 빨리 벗어내고 싶어 수속대가 열리자마자 컨베이어 벨트에 가방을 실려 보냈다. 몸이 가벼워지자 긴장이 풀린 듯 노곤했다. 또 공항 도착 전 맞은 비 때문인지 따뜻한 커피 한 잔이 간절히 생각났다.

정신을 가다듬으며 카페를 찾는데 아빠가 화장실이 먼저라고 하신다. 


이젠 아빠가 자리에서 엉덩이를 떼기만 해도 엄마의 걱정 레이다는 자동으로 돌아간다. 엄마는 내가 화장실에 간 아빠를 밀착 경호로 감시(?) 하길 바랬지만 설마.... 이번에도 또 사고를 치실까 싶었는데 역시.

설마는 사람을 잡는다.

한참이 지나도 아빠가 안 온다. 내가 진짜!!!!


결국 아빠 찾아 삼만리를 찍고 말았다. 다행히 한 공항의 크기는 일반 공항보다 '매우' 고만고만한 인데 아빠가 보이지 않는다. 아담한 크기의 공항이었으니 길을 잃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런데 웬걸 화장실 주변에도 아빠의 모습이 없다. 이번엔 대체 어딜 가신 거야. 식은땀이 주르륵 흐른다. 묶어 놓을 수도 없고!!


때였다아빠와 비슷한 실루엣이 기념품 가게 안에서 얼핏  보이는 게 아닌가.. 혹시, 아빠? 


아빠는 직원에게 5유로 지폐를 건네며 무언가를 사고 있었다. 가게 을 오가는 손님들 때문에 물건의 모습이 확실하진 않았지만 분명 무언가를 사긴 샀다.그런데 뭘 사시길래 저리 함박웃음을 하고 계실까 궁금했다. 혹시 엄마 버리고 도망간 게 미안해서 깜짝 선물이라도 사는  걸까? 아니면... 영원한 짝사랑 손녀딸 줄 선물?

설마... 가이드하느라 수고했다고 한테 주려는 선물?


계산대 직원과 두런두런 얘기하는 아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온갖 따뜻한 상상에 빠졌다. 마음이 벅차올랐다. 아빠가 날 이렇게까지 생각해 주다니.. 마치 선물을 받은 듯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때였다. 수다와 계산을 끝마친 아빠가 나왔다. 모른 척 수줍게 아빠의 선물을 받을 마음의 준비를 하는데.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아빠의 손에 들린 그 무엇인가를 보고 내 정신은 안드로메다 저 멀리로 사라져 버렸다.  정신 나간 여자처럼 웃기 시작했다.

웃다가 머리가 훽까닥 돌아버릴 수 있겠다 싶을 만큼  웃어제쳤다왜냐구?배꼽 잡고 웃어도 모자란 상황이 눈앞에 펼쳐졌기 때문이다.

세상에나 마상에나 럴수럴수 이럴 수가.


아빠의 손에 들린 건 다름 아닌, 로맨틱한 깜짝 선물도 감사의 징표도 그 무엇도 아닌.


독일산 캔맥주.



"아빠!! 출국 몇 분 앞둔 지금 이 시점에 맥주를 산 거야?" 


내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던 나는 황당한데 어이까지 없는 이 시추에이션을 어찌 수습해야 하나 혼란스러웠다. 웃긴 웃었는데, 막상 웃고 나니 그다음은 서운해해야 하나 아니면 쿨하게 맥주를 나눠 마셔야 하나 어찌한단 말인고!!


"아빠~!! 그게 뭐야... 맥주를 왜 샀어...? 스페인 안가?"


"허허~ 독일 맥주 맛있잖냐~ 언제 또 독일에 맥주를 마시러 오겠어. 아쉬운 마음에 맥주랑 작별 인사하려는 거지."


"아니... 그렇다고 비행시간 얼마 안 남았는데 맥주를 사면 어떻게 해.. 엄마한텐 뭐라 하려고..."


"니 엄마는 다 이해해주는 천사지~ 아빠 마음을 제일 알아주는 천사니까 당연히 이해하지~"


아빠의 영양가 없는 대답을 들으며 한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엄마와 아이가 기다리는 곳으로 가는데. 역시나, 아빠 손에 들린 맥주를 매의 눈으로 빠르게 스캔 한 엄마의 사자후가 멀리서도 들린다. 


"이 양반이 진짜 술을 왜 마셔!! 누가 공항에서 맥주를 마셔요. 화장실 다녀온다더니 화장실은 안 가고 맥주 사러 돌아다녔구먼?"


"그런 거 아니고~ 화장실 갔다가 맥주가 보이길래 아쉬워서 산 거지."


"아쉬울 것도 참 많네. 비행기 타야 하는데 맥주를 언제 마시고 가려고 그래! 아이고. 정말! 우리 집에 아들 없길 천만다행이지. 아들 있어서 며느리 봤어 봐. 어느 며느리가 조심성 없이 가방 바퀴나 고장 내고, 술 좋다고 공항에서 맥주 사 마시는 시아버지를 좋다고 하겠어. 기겁하고 도망가고도 남았지. "


"너 몰랐지? 그게 우리 집에 아들이 없는 진짜 이유란다. 남의 집 귀한 딸 데려다가 징한 꼴 보여주지 말라고 삼신할매가 알아서 손 쓴 거라 아들이 없는 거란다."


그제야 우리 집에 왜 아들이 없는지에 대한 미스터리가 풀렸다. 엄마의 억지가 양념된 논리이긴 했지만 왠지 설득이 되는 이유.


술 좋아하는 아빠가 행여 며느리라도 봤다가, 남의 집 귀한 딸 맘고생시킬게 분명하니 애초에 삼신할머니가 선을 긋고 막을 쳤다는 이야기. '삼신할머니의 빅 피쳐'의 이유가 바로 아빠의 엉뚱함과 연결된 술 사랑 때문이었다니. 여행 내내 직접 보고 들었는데도 믿기 힘든 건 왜 일까?


그동안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아들 노릇을 해야 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리며 살았다. 그래서 무뚝뚝하고 살갑지도 않게 굴었고 그렇게 하는 게 아들 노릇까지 해야 하는 장녀의 본보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진실을 알았으니!


이제부터 난 아들 노릇까지 하겠다는 부담은 벗어던질 거다. 


아빠와 서둘러 맥주를 나눠 마시고 증거인멸을 한 뒤 게이트로 향했다그런데 뭐지? 아빠의 뒷모습이 쓸쓸하다. 꿀 같다던 독일 맥주와 아쉬운 작별을 해야 해서일까? 아니면 한 캔을 오롯이 마시지 못해서일까?

아니면 평생 숨기고 싶었던 비밀이 밝혀져서였을까. 나는 속 시원해 신이 나는데 아빤 그게 아닌가 보다.


아빠! 그래두 어쩌겠어요. 이건 모두 삼신 할머니한테 밉보인 아빠 탓인데. 훌훌 털어 버리고 남은 여행 신나게 해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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