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킬번댁 Oct 23. 2021

하얀 소복을 입은 마릴린 먼로.

스페인을 여행하며 조심해야 할 두 가지를 꼽는다면, 그중 하나는 '소매치기' 일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심쿵사 일보직전의 '나대는 심장' 일 것이다.


유럽 여행에서 '소매치기'는 조심해야  넘버 원 요소라 부가 설명은 필요 없을 테고, '나대는 심장'은 스페인의 아름답고도 위험한  때문에 시도 때도 없이 심장이 두근거려 조심해야 할 넘버 투로 꼽게 되었다.


'아름다움'이라는 명사 이면엔 '위험하다'라는 형용사가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게 당연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유럽의 여러 나라 중 특히 스페인은 '아름다움 은 위험하다'라는 공식이 당연하게 붙는 나라였다. 눈은 즐겁지만 마음이 힘들다거나, 마음은 행복하지만 머리가 혼란스러운 .

하지만 그런 혼란에도 불구하고 매년 지구촌 수많은 인파가 찾아드는 곳.


서로 상반된 력은 블랙홀처럼 주변을 끌어들인다. 가시에 찔려 가 날지언정 장미를 손에 넣고 싶은 것처럼 강렬한 아름다움에 매료되면 그 이면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더라도 아름다움을 취하고 싶어 진다. 

혹독한 대가를 치를 것을 알면서도 아름다움을 탐닉하고픈 마음이 인간의 본능이라면 그 끌림의 중심에 스페인이 있다. 그러니 거부할 수 없었다. 그래서 스페인에 오게 된 것일지도.


역사 안을 오가는 인파 중 적어도 3분의 1은 소매치기와 집시 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엄마가 혹여 손녀딸 손을 놓쳐 버리면 어쩌나 한 걱정을 했다. 평소라면 호랑이 할머니가 온대도 절대 당황하지 않을 엄마였는데 토하듯 쏟아져 흐르는 인파가 낯설었는지, 그들 중 누군가가 갖는 위험을 감지한 것인지 강심장 엄마는 긴장했고 겁나 했다.


람블라스 거리를 둘러보고 보케리아 시장에 가려던 참이었다. 방금 전 우리가 머물게 될 아파트 발코니에서 보이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아름다움에 취해 감격 한지 겨우 5분이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마치 스페인의 '아름다움은 위험하다'는 공식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번엔 위험함에 심장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아빠! 엄마! 지하철 타면 이상한 애들이 막 들러붙을 거야. 걔들 100% 소매치기 거든? 그럴 땐 서로 떨어지지 말고 딱 붙어서 돈 가방에 손 못 대게 막아줘야 해. 너도 할머니 손 꼭 잡고 엄마한테 딱 붙어있어. 특히 아빠!! 절대 어디 가면 안 돼. 알겠죠? 아빠! 알았지?"


별일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계산하지 못한 변수 때문에 아이의 손을 놓치게 되거나, 아빠! 그래! 자유로운 영혼 우리 아빠를 놓쳐 엄마의 우려가 현실이 될까 나도 겁이 났다. 그래서 특히 아이와 아빠에게 거듭 당부를 했더랬다. 넷이 딱 붙어 떨어지지 말자는 말을 하며 아빠의 눈을 바라봤다. 알겠다고 답하는 아빠의 눈빛에 비장함이 흘렀다. 이번엔 믿어도 되겠지?


긴장감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지하철에 올랐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멀끔하게 생겼지만 돈에 굶주린 눈빛을 한 남녀 셋이 어슬렁 거리며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긴장의 촉수가 온몸에서 돋아나더니 예민하게 움직였다.

그렇다. 이놈들. 소매치기가 분명했다. 


적당히 붐비는 지하철이었다. 원한다면 옆 전동칸으로 넘어가 좀 더 널찍한 자리로 옮길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굳이 내 주변으로 몰려든 그들.  끊임없이 나와 눈이 마주치는 그들.

지나가는 관광객이었다면 많아야 두어 번의 눈 맞춤에 고개를 돌렸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내가 고개를 들 때마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당연했다나를 주시하고 있었으니 눈이 마주치는 빈도가 높아진 거다.


그들은 잘 짜인 동선에 맞춰 사냥감 몰이를 하듯 한 명은 내 오른편에 또 한 명은 뒤편에 그리고 나머지는 대각선 문 앞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는 전동차가 역에 정차해 사람들이 타고 내릴 때마다 실수인 듯 교묘하게 내 옷자락을 잡고 있는 아이와 나 사이를 떨어트렸다. 나름 반항(?) 하고자 몸을 뒤로 빼려 하면 뒤편에 있던 남자가 막아섰다결국 아이는 잡은 내 옷자락을 놓친 채 오롯이 할머니에게만 의지하게 되었고 지능적인 그들과 몇 번의 접촉이 더 생기자 아이를 잡을 수 없는 거리만큼 멀어지게 되었.


할머니의 손을 잡고 나를 부르는 아이의 목소리가 애처로웠다. 긴장하고 있었고, 그들이 다가오는지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얼마든지 그들을 물리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올무에 걸린 듯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덜컥 겁이 났다. 어떻게든 아이에게 가보고자 버둥거리던 찰나 그 틈을 몰아 여자 소매치기 하나가 과도한 몸짓으로 내 가방에 본인의 몸을 밀착시켰다. 겨우 역 세 개를 지나는 동안 일어난 상황이었다.


몸에서 돋아난 긴장의 촉수는 그들을 벗어나라 명령했지만 조직적으로 밀어붙이는 그들의 팀워크가 어찌나 완벽하던지 큰소리치고 만반의 준비를 했건만 눈뜨고도 코를 베일 것만 같았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꺼지라고 소리를 지르려고 했다. 돈을 가져가든지 말든지 있는 힘껏 거머리 같은 여자를 밀쳐 버리겠다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랬는데. 갑자기 아빠가 고함을 쳤다.


"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다들 딸내미 주변으로 붙어 모엿!"


아빠의 외침이 끝나기 무섭게 지하철을 타고 있던 수많은 시선이 우리에게 몰렸다. 잠시 뒤 이어진 침묵. 그 덕분이었을까? 가방 주변에  붙어있던 거머리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서였는지, 우리에게 들켰다 생각해서였는지 그들은 미션이 실패에 돌아갔음을 빠르게 인정하고 다음 타깃을 찾아 유유히 전동칸을 빠져나갔다.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표정으로)


집에 와 들은 얘기지만, 아빠도 자꾸만 몸을 밀착하는 그놈들 때문에 불안한 느낌이 들던 터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중 어느 한 놈이 우리를 흐트러 트리 고는( 돈 냄새를 맡았는지) 날 집중 마크해 질척 거리는 폼이 돈을 뺏으려고 작정한 것 같았다고. 마음먹고 덤비는 그런 놈들은 돈을 가져가고도 해를 끼쳐 안 되겠다 싶어 주의를 끌게 되었다고 했다. 창피함을 무릅쓰고 딸도, 돈도 지키기 위해 기발한 생각을 해낸 아빠였다. 아빠를 걱정할게 아니라 내 정신무장부터 다시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소매치기에게 진만 빨리고 드디어 UNIVERSITA 역에 도착했다. 역 밖으로 나오자 사방을 메운 여러 나라의 언어와 인종이 춤을 추듯 거리를 활보했고 그 틈 사이로 보이는 예술가와 상점들이 절묘하게 어울려 마치 축제의 현장에 서있는 듯했다. 방금 전 식겁했던 소매치기 사건으로 두근대던 심장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신나는 열성에 두근대기 시작한다.


길 양쪽으로 늘어선 플라타너스가 람블라스 거리를 풍성하게 만들었다. 이 거리를 따라 남쪽으로 가다 보면 고딕 지구와 콜럼버스 동상과 만나게 될 것이고, 그 반대편으로 가다 보면 바르셀로네타 해변을 만나게 될 것이다.

1년 내내 사람이 끊이지 않는 여행자의 거리. 길가에 세워진 오렌지 나무는 며칠 내 잘 익은 오렌지를 떨어뜨리며 거리를 상큼한 향기로 가득 채울 테고 오후가 되면 각종 타파스 가게들이 일제히 문을 열어 우리를 기꺼이 맞이해줄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마음이 들떴다. 언제 소매치기를 만났는지 잊을 만큼 바르셀로나는 아름다웠다.


한참 들뜬 마음으로 떠들고 있는데 길 건너 한 곳을 응시하며 모여있는 수십 명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방송 촬영이라도 하는가 싶어  사람에게 무슨 일이냐 묻자 그가 답했다.


"몰랐어? 마릴린 로가 왔잖아!"


응? 오래전 샤넬 넘버 5와 함께 하늘의 부름을 받은 그녀? 나풀거리는 흰 드레스를 입고 환풍구 위에서 춤추던 바로 그 섹시의 아이콘? 진짜 마릴린 먼로가 살아왔을 리는 없고 영화 촬영 중인가 싶어 두리번거렸지만 주변엔 그 어떤 장치도 보이지 않았다.


가짜 마릴린 먼로인 것을 알지만, 이렇게 많은 인파가 모였다면 못해도 큰 이벤트를 하는 중일 테니 잘하면 좋은 구경을 하겠다 싶어 그녀를 기다리는데, 헉! 이럴 수가 진짜 메릴린 먼로다. 영화 속 그녀가 손을 흔들고 있다.


하얀 치마를 나풀거리며 발코니로 걸어 나온 금발의 늘씬한 그녀는 영화에서 봤던 바로 그 마릴린이었다. 가느다란 몸을 알랑알랑 흔들던 그녀가 열광하는 팬들에게 답이라도 하듯 빙그르 돌다 보일 듯 말듯한 치마 속을 부끄러운 듯 가려내고 있었다. 그러자 우레와 같은 환호가 람블라스 거리를 가득 채웠다.


그녀가 가짜 마릴린(에로틱 박물관 홍보 요원) 이라는 건 너도, 나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진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 열광의 도가니에 함께 한다는 게 중요할 뿐이었다. 그들은 진짜 마릴린을 만나기라도 한 듯 휘파람을 불며 환호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손키스를 보내기라도 할 때면 함성소리는 자지러질 듯 음정을 높일 뿐이었다.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어릴 적 즐겨보던 '국군의 무대'라는 프로그램이 생각났다. 예쁜 여자 초대 가수가 나올 때마다 텔레비전을 뚫고 나오던 그 함성. 뽀빠이 아저씨의 진행 아래 어깨 높여 박수를 치며 흥을 주체 못 하던 군인 아저씨들과 이들의 모습이 오버랩되자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덩달아 신이 난 나는 다음 일정은 까맣게 잃어버린 채 거리의 군인 아저씨들과 함께 발코니의 샬랄라 한 마릴린의 모습을 열심히 사진에 담고 있었다. 그런데 입이 대빨 나온 (삐졌다는 우리 엄마식 표현) 딸내미가 퉁퉁 부은 얼굴로 내 팔을 잡아끌더니 배꼽 빠지는 한 마디를 한다.


"엄마!! 우리 언제가? 계속 여기만 있을 거야? 난 저 언니 싫어. 하얀 옷 입고 빙글빙글 돌기만 하고. 이쁘지도 않고. 꼭 처녀귀신 같이 생겼는데 왜 보고 있는 거야? "

그럴 테였다. 그녀가 아무리 세기를 대표하는 섹시의 아이콘이라 할지라도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바라본 그녀는 그저 하얀 소복을 입은 처녀 귀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거다. 순간 어찌나 웃음이 나던지. 하는 수 없어 자리를 뜨는 게 좋을 것 같아 몸을 돌리던 그때. 마릴린에게 정신이 팔린 누군가의 배낭을 살포시 열어 무언가를 찾기에 바쁜 형체가 보였다.


소매치기를 하고 또 당하는 순간을 목격한 것이다. 이렇게 아름다워 즐거운 순간에 누군가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니아름다운 그녀를 뒤로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위험함이 이렇게 빨리 따라왔을 줄이야. 스페인의 아름다움은 위험하다 라는 공식이 진실임을 제대로 확인하게 되자 등줄기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아름다움을 갖기 위해 위험함을 감수한다는 것은 어쩌면 잔혹할지 모른다. 하지만 어쩌랴. 위험이 동반됨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움을 탐하기 위해 이 나라에 온 것을. 두렵지만 아름다운 이 도시를 포기할 수 없는 것을.

인파를 뚫고 보케리아 시장으로 발길을 돌리며 내가 한 최선의 행동은 둘러맨 가방을 단속하고 식구들을 계속해 챙기는 것뿐이었다.

무사히 숙소에 도착해 지갑이 사라진 것을 안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했을까 상상해 봤다. 아름다움을 얻기 위해 당연히 감내해야 하는 일이라 생각했을까. 아니면 지긋지긋한 도시라며 욕을 했을까.

아름다운 성가족 성당 아래 짙게 깔린 어두운 그림자가 인상적이다.

내일은 또 무슨 일이 생길까 두려움에 잠들지만 감출 수 없는 설레임. 스페인이 확실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