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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킬번댁 Oct 23. 2021

마나님과 부엌데기 그 중간 어디쯤.

오전 일곱 시.


엄마는 오늘도 어김없이 가족들 중 제일 먼저 일어나 아침을 만들고, 손녀딸 점심 도시락과 간식을 싸고, 저녁 먹을 재료를 미리 손질하느라 정신이 없다. '관광하고 들어오면 피곤하니 나서기 전에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는 엄마의 말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행 와서까지 부엌을 차지하고 있는 엄마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가 지금 있는 곳이 한국인지, 스페인인지 아리송했다. 그와 반대로, 엄마보다 늦게 일어났음에도 손 보탤 생각 없이 우아하게 신문을 읽는 아빠의 모습은 익숙하지만 낯설고 볼 때마다 속이 끓었다.


부모님 두 분을 모두 사랑하고 아끼지만 이런 불편한 모습이 연출될 때면 괜스레 속상하고 억울했다. 특히나, (조용히) 신문만 보면 좋았을걸 엄마에게 물 좀 가져다 달라 말하는 아빠의 요구성 멘트를 듣는 순간엔 더욱 그랬다. 이럴 때면 은근 약이 올라 아빠에게 싫은 소리를 하게 되는데.


"아빠~! 엄마 힘든 거 안 보여? 여행 와서까지 엄마를 부려 먹음 어떡해. 아빠가 엄마 좀 도와주지."


"얘~! 니 아빠가 언제 도와주는 사람 이디? 니 아빠도 피곤해 그렇지. 더 잘하는 사람이 하면 되는 거지, 뭘 그런 걸 따지고 그래?"


"엄마! 엄마가 무슨 희생의 아이콘이야? 엄마 그러다 평생 부엌데기 되면 어쩌려고 그래. 엄마가 알아서 자신을 챙겨야 아빠도 엄마 귀한 줄 알지. 맨날 놔둬요, 내가 할게요 하면 당연한 줄 안다니까!"


"아무렴 니 아빠가 날 부엌데기라고 생각하겠니? 매일 마나님, 마나님 하는데. 니 아빠 나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데 측은지심으로 내가 해줘야지. 기집애가 야박하게 따지고 그래! "


설마에 발등이 여러 번 찍혔으면서도 언제나 그렇듯 가시 돋친 내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빠를 감싸는 엄마를 보면 맥도 풀리고 김도 빠지기 일수. 엄마는 말한다. 더 잘하는 사람이 움직이면 되는 거라고. 하지만 왜! 매번 움직이고 마음 졸이는 건 엄마일까?



차라리 화를 냈으면 좋았을 것을. 천사 강림도 아니고 스페인까지 와서 식구들 밥 챙기는 엄마가 안쓰럽고 못마땅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엄마 팔을 낚아채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깜짝 놀라 할 말을 잃은 엄마를 끌고 전날 세바스찬이 말한 카페를 찾았다. 길 건너 보이는 작은 카페로 우격다짐하듯 엄마를 밀어 넣었다.


"엄마. 이거 세바스찬이 준 공짜 쿠폰이야. 아침에만 쓸 수 있는 건데 크루아상이랑 커피가 공짜래. 근데 딱 두 장 밖에 없어. 엄마 지금부터 밥 걱정은 접어두고 우리 둘이 굿모닝을 즐겨봅시다. 우리가 언제 이런 걸 해봐. "


엄만 망설였다. 두고 온 손녀딸이 걱정된 것인지, 엄마 없이 밥을 못 먹는 남편이 걱정된 건지 모르겠지만 딸의 뜬금없는 요구에 혼란스러워했다. 내가 아빠한테 전화할 테니까 엄마! 제발 밥 하는 거 신경 쓰지 말고 좀 즐겨.


"아빠~! 나 지금 엄마랑 나왔어. 어! 윤이랑 그냥 햇반 데워 드세요. 반찬은 싸온 거 먹음 돼요."


내부를 복층으로 꾸며놓은 아담한 카페 중앙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난감해하는 엄마를 달래고 공짜 쿠폰을 직원에게 보여주자 단번에 '세바스찬의 손님' 임을 알아차렸다. 공으로 커피와 빵을 먹는 것도 즐거운데 반가움까지 더해지니 아빠와 아이를 두고 나왔다는 미안함이 홀연히 사라졌다.


고소하고 달콤한 향이 나는 갓 구운 크루아상과 커피를 사이에 두고 엄마를 봤다. 여행을 하면 너무 즐거운 나머지 몸의 부기가 쪽쪽 빠진다고 말한 엄마가 '그놈의 밥' 때문에 눈앞에 둔 '공짜 밥'을 먹지 못하고 있었다. 미안해하는 엄마의 마음을 풀어보고자 원래 스페인에선 아침에 빵을 먹는 게 전통이라며 우린 지금 스페인 전통을 지키는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아무 말 뻥 잔치를 했다. 딸내미의 호들갑이 기특했는지 한참 뒤에서야 엄마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한결 가벼워진 분위기를 몰아 엄마에게 제일 하고픈게 무엇인지 물었다. 그러자 돌아온 대답은 "보케리아 시장에 꼭 가보고 싶어"였다. 성당이나 미술관에 가고 싶다는 대답을 예상했는데 엉뚱하게 재래시장이라는 말이 나와 놀랐지만 티 내지 않았다.


"엄마! 시장은 평소에도 다니잖아. 그런데 왜 하필 여행 와서까지 시장이 먼저야?"


"장 봐서 우리 식구 맛있는 거 만들어 주려고 그러지."


"아니, 오마니! 그런 식상한 대답 말고 센스 빵빵한 대답 없으십니까? 엄마가 그렇게 말하면 너무 부려먹는 것 같잖아. 나 죄책감 느낀다고!"


"얘~ 그런 게 어딨니? 엄마가 가족들 맛있는 거 만들어 먹이고 싶은 건 당연한 거지."


"엄마! 그 당연한걸 안 하는 엄마도 있어. 나 봐~! 나 우리 윤이한테 제대로 안 해 먹이잖아."


" 으이그! 자랑이다. 너야 엄마가 가까이 있고, 니가 안 해도 챙겨줄 사람이 많으니까 그런 거지. 그래도 어깨 너머로 보고 배운 게 있어서 막상 하면 잘하게 돼있어. 해줄 사람 없이 닥쳐봐라. 안 하고 베기나."


"맞아. 나는 진짜 엄마 덕분에 어린이 거저로 키웠지. 애 똥기저귀도 못 갈아서 도망가고 그랬는데. 엄마 없었음 어쨌을까 생각하면 진짜 아찔하다니까. 근데 엄마. 그래도 이제는 식구들 해먹이는 거에 신경 좀 덜 써도 돼. 이런데 나오면 당연히 빵도 먹고 한 끼쯤 굶고 그러는 건데 계속 밥 때문에 신경 쓰면 어디 불편해서 관광이나 하겠어?"


엄마는 웃었다. 나 생각해 주는 건 딸내미 밖에 없다며 맑게 웃었지만 난 그런 엄마의 웃음이 슬펐다. 이억 만리를 날아왔음에도 가족들 먹일 생각에 들뜬 엄마가, 오롯함을 즐기지 못하고 가족의 즐거움을 통해 당신의 즐거움을 찾는 엄마가 안쓰러워 눈물이 났다. 그래서 커피 향이 공기를 감싸고 따뜻한 빵에 온기가 도는 그날의 아침은 서러운 눈물로 기억된다.


엄마가 서둘러 마신 커피잔을 뒤로하고 더 이상 부드럽지 않은 엄마의 손을 잡고 숙소로 돌아왔다. 아빠와 아이는 지금이 기회다 싶었는지 컵라면 모닝을 즐기고 있었다. 반찬 냅두고 아침부터 웬 라면이냐는 엄마의 잔소리에 아이가 말했다.


"할머니! 나는 세상에서 라면이 제일 맛있어!"


입을 막을 새도 없이 할머니가 해준 밥 보다 컵라면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는 진심을 털어놓는 손녀딸의 말에 한바탕 웃음이 지나갔다. 거봐. 엄마! 그냥 두면 알아서 잘 먹는다니까.


서운 할 법도 한데 보케리아 시장에 도착해 제일 큰 환호성을 지른 사람은 다름 아닌 엄마였다. 당연했다. 보케리아 시장은 일명 유럽에서 가장 다이나믹하고 아름답고 화려한 수식어로 가득 찬 곳이 아니었던가. 하루 방문객만 하더래도 무려 30만 명에 13세기 초 문을 연 이래 단 한순간도 유럽 최고의 자리를 뺏기지 않는 시장, 먹거리뿐만 아니라 스페인의 명품 향신료나 올리브 오일, 하몽과 같은 특산품이 200곳이 넘는 가게에 펼쳐진 곳이니 환호성이 나올 수밖에.


엄마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형형 색색의 과일과 채소를 마치 심사위원 품평하듯 찬찬히 둘러봤다. 내 눈엔 다 똑같아 보이는데 엄마는 설레어하며 구경했다. 그런 엄마가 신기해 나도 엄마의 시선을 따라 시장 구경을 했다. 그러자 그동안 보이지 않던 재미난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내 주먹 두 개를 붙여놓은 크기의 오렌지며 수십 가지가 넘는 견과류와 초콜릿들, 즉석에서 갈아주는 원색의 과일주스, 화이트 와인에 방금 껍질을 깐 탱글한 굴을 호로록 마시는 관광객을 보고 있자니 나도 덩달아 신이 났다. 시장 보는 일이 이렇게 즐거운 일 이 란걸 엄마를 통해 처음 알았다.


엄마가 백화점이 아닌 시장에 온 게 천만다행 이라며, 명품 가게에서 저렇게 쇼핑했음 우리 거덜 났을 거라는 아빠의 실없는 농담과 타파스 가게에서 나오는 맛있는 향기가 재미있게 뒤섞였다. 즉석에서 썰어낸 하몽에 붉은 와인을 마시는 모습에 침이 꼴깍 넘어갔지만 술타령으로 엄마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 말린 과일과, 불량식품이 생각나는 과일주스를 한 잔씩 마시며 시장 구경을 마쳤다.


새우와 이름 모를 생선, 얇게 썰린 하몽과 와인 그리고 아이를 위해 앙증맞은 컵에 담긴 체리와 달콤이 들을 폭풍 쇼핑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 엄마의 발걸음이 가벼워 보였다. 가족들 먹일 생각에 연신 싱글벙글한 엄마가 선택한 오늘의 메뉴는 자그마치 지중해의 신선한 해산물로 만든 고추장 해물찜이었다. 콩나물이 없어 아쉽다는 엄마의 말에 아무렴 어떠냐고, 엄마가 만들면 자갈로 밥을 지어도 고슬고슬 찰지게 먹을 수 있다고 말하자 엄마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엄마는 어딜 가나 식구들 생각이 먼저다. 그곳이 한국이든, 스페인이든, 그 어디든 말이다. 어딜 가든 가족이 먼저인 엄마에게 받은 사랑은 특별하고 중독적이다. 그래서 난 그 사랑엔 반드시 보답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랬기 때문에 엄마가 가족을 챙기는 동안 당연한듯 여유부리는 아빠를 볼 때면 속이 답답했고, 엄마의 존재가 마나님과 부엌데기 중간 어디쯤에 있는것 같아 가슴이 아펐다. 하지만 오늘부터는 더이상 속상하고 씁쓸해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엄마가 좋아서 하는 일, 거기서 나오는 행복은 결코 내가 이렇다 저렇다 단정 짓고 판단할 수 없다는걸 오늘에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엄마에게 희생은 아빠를 사랑하는 표현이고 가족을 보듬는 방법일 테니 말이다.


발코니 창을 열었다. 창가를 넘어 들려오는 관광객들의 말소리와 가게 직원들의 수다가 정겹다. 무려 가우디 인생 역작을 앞에 두고 식구를 위해 밥을 짓는 엄마가 행복해 보인다 그걸로 충분하다. 그래서 이 순간 참으로 행복 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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