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킬번댁 Oct 23. 2021

인생은 '육십'부터라는 거짓부렁.

이번 여행을 계획하며 가장 하고 싶었던 은 부모님을 위한 신나는 사건 하나를 만들어 드리는 일이었다. 부모님을 모시고 먼 나라로 여행을 가는 것도 즐겁고 신나는 일이겠지만 뭐랄까 살짝 부족한 느낌? 재미는 있는데 강력한 한 방이 없어 허전한 기분?


박물관, 미술관도 좋고다른 나라의 음식과 문화를 체험하는 것도 재미있지만 뭐랄까 그것보다 더 신나는 것, 남들은 잘 못하는 색다른 경험을 부모님께 선물하고 싶었다. 그런 거 있지 않은가. 감사함에 놀라움을 더하는 순간 그것은 평생의 추억이 될 것이고,  때론 그 추억 하나로 인생이 기깔나게 즐거워지기도 하는 것 말이다.


그래서 찾고 찾고 또 찾았다. 자유 여행에서도, 패키지여행에서도, 있긴 있는데 흔하지 않아 더 해 보고 싶은 것. 그것은 바로 '스페인 와이너리 현지 투어.'


고심 끝에 선택한 와이너리는 카탈루냐 지방의 역사 깊은 전통을 고수해가는 스페인의 대표적인 와이너리 '코도 뉴'(codorniu)였다. '코도 뉴(codorniu) 와이너리'는 규모도 컸지만 무엇보다 프랑스 샹파뉴 지방에서 배워온 샴페인 만드는 방법을 그대로 재현해 스페인에서 최초로 '발포성 와인인 cava'를 만들어낸 유서 깊은 곳이기도 했다. 거기에 바르셀로나 근교에 위치해 우리 같은 뚜벅이 여행자도 무리 없이 대중교통을 이용한 투어가 가능한 곳이었으니. 그렇다. 여긴, 안 가면 손해다!!

와이너리로 향하는 기차 안은 장바구니를 들고 나른하게 졸고 있거나, 해바라기씨를 까먹으며 수다를 떠는 사람이 한데 어우러져 정겨운 풍경을 만들어냈다. 바르셀로나를 벗어난 지 겨우 30분이 지났을 뿐인데 관광지 밖 스페인의 모습은 무척이나 여유롭다. 얼마를 달렸을까?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올리브인지 포도나무인지 모를 푸릇함으로 채워졌다. 느낌이 온다. 드디어 도착했구나.


역을 나와 주변을 둘러보니 눈에 보이는 건 휑뎅그레한 간이역 광장과 페인트가 반쯤 벗겨진 택시 승강장뿐이었다. 여기서부터는 (가능하면) 택시를 타는 게 좋다고 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사람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방금 전 타고 내린 기차는 마법나라 기차였던가? 대체 우릴 어디에 내려 주었길래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는 것일까. 하는 수없이 구글 지도를 켜고 지도가 말하는 방향으로 5분을 걷자 마을이 나왔다. 그런데 뭔가 분위기가 스산하다.


좀비 떼의 습격이라도 받은 걸까? 마을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카페와 레스토랑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심지어 도로는 텅 비어 있었다. 마을에 가면 택시를 탈 수 있을 거라 예상했는데 택시 씨알도 보이지 않으니 어쩌겠나. 걸을 수밖에.

아...이거 뭐지? 지도가 말하는 와이너리 방향은 마을 밖 길 건너 저편 어딘가인데 어찌 된 일인지 벌써 한 시간 마을 안만 빙글빙글 맴돌고 있었다. 귀신에 홀린 걸까? 마을에 홀린 걸까?

인적 없는 고요함에 적막함이 더해지자 두려움과 공포가 느껴졌다. 등골이 오싹했지만 무섭다 티를 낼 수 없어 핸드폰만 뚫어지게 보고 있는데 드디어! 2미터 뒤 도로 건너에 도착점이 있다는 표식이 화면에 보였다.

그런데 아.... 이건 또 뭐지? 2미터 뒤 눈앞에 나타난 도로는 다름 아닌 버스와 트럭이 다니는 3차선 대형 도로였다.


바로 앞이 절벽인데도 '직진하세요'라는 말만 외친 귀신 들린 내비게이션처럼 구글 지도 역시 귀신에 들린 것처럼 계속해서 '직진' 신호만 보내고 있었다. 이놈의 구글맵이 미쳤나! 이대로 가다간 와이너리고 뭐고 황천길이라고!!


마음 같아선 모든 걸 포기하고 기차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큰소리치고 나온 길, 어찌 되었든 썩은 포도라도 밟아 했다.


으아아악!! 결국 우린 서로가 낼 수 있는 최고 데시벨의 비명을 지르며 이러다 오줌을 지릴지도 모른다는 아빠의 말이 사실임을 증명하고 나서야 공포의 3차선 도로를 건널 수 있었다.

너덜너덜해진 몸과 정신을 붙들어 잡고 직원에게 예약 확인증을 건네자 녹색 밴드 네 개를 준다. 이걸 받자고 미친 여자 발광하듯 그 도로를 건넜단 말인가. 깊은 후회가 몰려왔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다들 무사하니 그걸로 되었고 억울하면 잠시 후 있을 투어를 신바람 나게 즐기면 되는 거다. 우선은 그렇게 정신승리하는 걸로 마음먹고 주변을 둘러보자 우리를 포함해 스무 명 남짓한 투어 인원이 보였다. 곧이어 연세가 지긋해 보이는 직원 한 분이 반갑게 인사하며 이제 곧 시작할 투어에 대한 짤막한 설명을 곁들였다.


" 와이너리 투어는 꼬마 기차를 타고 농장 주변을 둘러보며 와인에 대한 기초 상식을 배우는 것을 시작으로 지하에 있는 와인 저장고를 둘러보며 더욱 전문적인 지식을 토론하고, 마지막으로 그동안 배운 와인을 직접 시음하면서 마무리됩니다."


투어는 생각 이상으로 재미있었고 전문적이었다. 특히 거대한 개미굴처럼 촘촘히 이어지고 펼쳐진 길마다 놓인 수천병의 와인과 길 끝에 만들어진 동굴 속에서 익어가는 와인을 보게 될 즈음엔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짜릿하고 신비로웠다. 그뿐 아니라 소믈리에가 풀어내는 와인에 대한 방대한 지식과 곁들인 이야기를 들으며 수천병의 와인이 뿜어내는 향기를 맡을 때에는 그야말로 신기하고 묘한 기분이 온몸에 퍼졌다.

코도 뉴의 역사를 볼 수 있는 관람실을 끝으로 투어를 진행한 직원이 우리 팀 모두를 동굴 와인바로 이끌었고 드디어 오늘의 하이라이트. 와인 시음 시간이 되었음을 알렸다. 한 사람이 마실수 있는 와인은 총 두 잔. 한 잔은 로제, 한 잔은 화이트로 매니저가 설명해준 brut(당도 1%)와  seco(당도 4%)의 와인이 제공되었다. 물론 아이에게도 이곳 와이너리에서 직접 나고자란 포도로 만든 백포도 주스가 총 두 잔이 제공되었다. 술을 못 마시는 투어객을 위한 와이너리의 배려라니. 힘들게 온 보람이 있구나.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고 했던가. 넉넉히 담아준 공짜 cava는 그야말로 꼴 딱 꼴 딱 목을 타고 잘도 넘어갔다. 보글보글 소리가 목 어딘가에서 들린다는 아빠의 농담에 까르르 웃어넘기는 엄마의 모습과 포도 주스를 와인 인양 흉내 내며 마시는 아이를 보고 있자니 투어 전 식겁한 사건은 이미 잊은 지 오래. 재잘거리는 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한참을 웃고, 또 와인에 취해 있을 때였다. 방금 전 우리를 신바람 나는 신세계로 안내해준 직원이 다가오더니 난데없이 질문을 해댄다


"손녀딸인가요? 몇 살이에요? 손주와 함께 여행 중인가 봐요? 스페인은 처음인가요?"


뜬금없는 그의 질문에 우선 고개 먼저 끄덕인 아빠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그가 호탕한 웃음을 지어 보인 뒤 자신이 온 이유를 설명했다. 


"많은 투어를 진행했지만 할아버지와 손주가 함께 있는 경우는 처음이라 놀랐어요. 이 사진 보세요. 나도 손주가 넷이나 있어요. 얼마나 귀여운지. 당신을 보면서 나도 우리 손주들과 함께 여행을 가는 걸 생각해 봤어요.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아 얘기를 듣고 싶었어요."


전문 지식 미를 뿜어대던 직원의 모습이 갑자기 스페인 할배의 모습으로 둔갑했다. 서로의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보여주며 손주 자랑을 하는 두 나라의 할배를 보고 있으니 손주를 향한 지구촌 할배들의 마음은 위 아더 월드임이 틀림이 없는 것 같았다. 두 할배는 와인 반 병이 사라질 동안 손주 얘기 가족 얘기로 시간을 보냈고 그러는 중간중간 한국 할배는 스페인 할배의 여전히 일하는 모습이 부럽고 멋지다고 말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아빠 얼굴이 복잡해 보였다. 지금쯤이면 몇 번이고 와인에 대한 찬사를 보내며 실없는 농담을 해야 우리 아빠일 텐데. 맛있는 카바를 공짜로 마셨고, 스페인 할배의 기분 좋은 배웅도 받았는데 왜인지 전혀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와인 농장 투어 때만 해도 즐거워 함박웃음을 짓던 아빠였는데 심란한 표정에 침묵하고 있는 아빠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무겁다. 한참을 그렇게 생각에 잠겨있던 아빠가 부러움 가득한 목소리로 드디어 말을 꺼냈다.


"아~ 그 사람 능력이 대단해. 저 나이에 현장에서 전두지휘하며 일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주눅 드는 거 하나 없이 당당하네. 나는 이 나이에 어디 이력서를 낼 수도 없고 당최 써주지를 않는데. 에휴. 우리나라는 인생은 육십부터다 말은 해도 그거 다 거짓부렁이지. 누가 인생 육십에 즐겁게 살아. 아프지 않고 멸시나 안 당하면 그나마 다행이지.... "


아빠의 얼굴엔 수많은 생각이 오가는 것 같았다. 그런 아빠에게 어떤 말이든 건네 위로하고 싶었지만 딱히 생각나는 말이 없었다 그러다 퇴직 전 아빠와 나눴던 대화가 문득 떠올랐다.


"아빠! 퇴직을 앞둔 심정이 어때?"


"응. 시원한데 섭섭하고 두렵고 그래."


"시원하면 시원했지 왜 섭섭해? 나 같으면 홀가분하고 자랑스러울 것 같은데."


"네 나이는 현실의 정점을 살아가고 있는 나이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 퇴직하고 나면 시원할 것 같은 게 당연해. 그런데 아빠는 말이야, 100세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사람으로서 앞으로 남은 40년의 삶 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또 볼 수가 없으니까 마음이 무겁고 그래."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어. 아빤 걱정도 참 많아."


" 아빠도 처음엔 퇴직하면 내가 하고 싶은 일 마음껏 하게 되니 그저 기쁘다고만 생각했는데, 막상 퇴직을 앞두고 있으니까 생각이 많아지네. 누군가에게 퇴직은 무거운 인생의 짐을 내려놓고 맞이하는 달콤한 안식년 일 수 있겠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눈앞에 세워진 결코 넘지 못할 거대하고 두려운 장벽을 마주하는 일 이 되기도 한다는 걸 알게 되었거든."


"아빠! 그동안 열심히 일하셨잖아. 휴식을 즐길 자격 충분히 있으셔. 자식들도 열심히 살고 있고. 아빠랑 엄마 두 분만 건강하면 됐지 뭐가 걱정이야. 먹고살게 걱정이면 설마 산 입에 거미줄 치고 살겠어요?"


"살기야 살겠지. 하지만 어떻게 살아가느냐는 고민 해 봐야지. 나이 먹고 뒷방 늙은이로 살아가느냐, 인생은 60부터 라고 하니 남은 인생 새롭게 살아가느냐."


그때 그 대화를 떠올리고 나서야 아빠가 그동안 걱정했던 것들이 무엇인지, 오늘 아빠가 무얼 느끼며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알 것만 같았다. 아빠는 대한민국 모든 아버지들이 그러하듯 퇴직을 앞둔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며 지냈던 거다. 그런데 난 아빠가 처한 입장과 상황에 대해 생각해 보기는커녕 다 안다고 착각이나 하고 있었으니....


야심 차게 준비한 이벤트였는데 나는 결국 아빠에게 당신이 직면한 현실과 풀어야 하는 숙제를 여실히 보여준 것이었다. 바보같이 아빠가 입장료에 포함된 공짜술을 좋아할 거란 착각을 하면서 말이다.


어쩌면 아빠는 이번 여행을 계기로 인생을 리셋하는 특별한 결정을 내릴지도 모르겠다. 그 결정이 뒷방 늙은이로 살아가는 것일지, 아니면 새로운 인생을 위해 한 발 돋음 하는 것일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난 믿는다.

우리 아빠니까, 우리 아빠라서 원하는 무언가를 반드시 이뤄낼 것을.

그래서 비록 눈치 없는 딸의 영양가 없는 말이긴 하지만 그래도 꼭! 이 말만은 아빠에게 해주고 싶었다.


" 아빠! 쉼 없이 달려온 아빠의 인생을 진심으로 존경해요. 그리고 지금부터 펼쳐질 아빠의 새로운 인생을 응원 할께요. "






이전 16화 마나님과 부엌데기 그 중간 어디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