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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애틀의 낭만적인 밤

시애틀 두 번째 이야기

by summer

시애틀에서의 이튿날,

그리고 J와 함께하는 여행의 시작이었다


우리는 전날 회포를 푸느라 와인을 한껏 마셨고 나는 아침부터 숙취를 동반한 두통에 하루 종일 누워있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나보다 술이 센 J는 아침(비록 오후 1시였지만)을 만들어주기까지 하면서 나를 일으켜 세웠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는데 프리몬트 선데이 마켓을 구경하러 다녀왔다. 선데이 마켓은 오후 4시까지 진행되는데 우리가 도착한 시간은 오후 3시였다. 생각보다 구경할게 많았던지라 한 시간밖에 못 본 것이 퍽 아쉬웠지만 "선데이"마켓이기 때문에 다시 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Fremont sunday market


결국 우리는 미련을 남긴 채 다음 행선지인 Gas works park로 향했다.


Gas works park는 시애틀의 야경명소로 유명했다.


해가 지는 장면을 보고 싶어서 서둘러 마켓 근처 버스 정류장에 갔다. 버스는 20분 정도 달리더니 주택가 같은 길에 멈췄다. 거기서 조금 걷다가 횡단보도 하나를 건너 공원 안으로 들어갔는데 들판같이 넓은 터가 나왔다.

하늘은 다섯 시부터 어스름해지기 시작했다.

점점 짙어지는 하늘에 땅도 빛을 잃어 공원은 벌써 어둑해져 있었다.

저 멀리 gas works park의 명물인 폐발전소가 보였다. 한국인들 사이에선 폐발전소의 모습이 '하울의 움직이는 성'과 비슷하다는 말이 돌았다. 어릴 적부터 그 애니메이션에 로망이 있던 내가 꼭 오고 싶어 한 장소였다.

커다랗고 조금은 괴상한, 녹슨 동색의 발전소와 사진을 몇 장 찍고, 바다 너머 펼쳐진 시애틀의 스카이라인을 바라보았다. 뉴욕이나 홍콩처럼 대단하게 화려하진 않지만 묘하게 조화로운 빌딩들이 빛을 내는데 꽤 낭만적이었다.


여기선 시애틀의 우주선도 볼 수 있었다.


야경을 찍는 나


우리는 공원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 올라갔다.

물이 있어서 그런지 바람이 차가웠는데 핫팩마저 식어서 제 기능을 못할 정도였다.

바람 막아줄 데 하나 없는 그 언덕 위에서 J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 주제곡인 '인생의 회전목마'를 틀어줬다. 어느새 해를 잃고 조명에 의지하게 된 공원은 사람을 더 감성적이게 만들었다.

들을 때마다 설레는 피아노 선율이 흘러나왔다. 항상 막연히 떠올리곤 했던 영화 속 그 장면이 눈앞에 실현되고 있었다.


추운 날씨에 발은 동동거리고 손은 주머니에서 꺼내기도 힘들었지만 노래와 어우러지는 영화 같은 풍경에 행복해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노래는 한참이나 반복되었다.

이제 인생의 회전목마가 들리면 영화가 생각나기 전에 시애틀에서 본 야경이 먼저 생각날 것 같았다.

저녁을 먹기 위해 돌아가는 길, 그 근방은 굉장히 어두웠다. 듬성듬성 있는 가로등은 길을 온전히 밝혀주지 못해 핸드폰 라이트를 켜고서야 겨우겨우 내려갈 수 있었다.


시애틀의 야경은 황홀했다. 무엇보다 나를 위해 노래를 틀어준 친구가 있다는 것이 그 시간을 완벽하게 만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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