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내는 시간

크로아티아 6

by 최열음

오늘은 아침을 거르기로 했다. 아침을 먹을 만한 시간에 일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평소라면 열시에 일어나 열한시면 꾸물거리며 거실로 내려오는데, 오늘은 열한시에 일어나버렸다. 차라리 한시간을 기다렸다가 점심을 먹는 게 나을 시간이다.


우리는 밥과 면을 오가며 탄수화물을 채우고 있다. 탄수를 먹어야 하루를 살아갈 힘을 낼 수 있으므로. 나와 현아 모두 단백질보다는 탄수화물을 택하는 편이었다. 물론 밥상에 둘다 있으면 좋긴 하지만. 우리는 가성비 여행자니까 최소 준비물에서 최대 결과물을 이끌어내야 한다.


지난 끼니에 밥을 먹었으니 이번에는 파스타를 한번 먹어주기로 한다. 어제 저녁에는 현아가 한식대첩을 열엏다. 감자볶음에 쏘야(소세지 야채볶음), 계란말이에 양배추쌈까지. 감격의 한국 밥상을 맛봤다. 이제 내가 느끼한 서양식을 선물할 차례이다. 곧 만들어낼 허연 크림파스타를 생각만 해도 왠지 조금 미안해진다.


류수영의 원팬파스타를 아주 좋아한다. 면을 따로 끓이지 않고 우유에 바로 면을 삶아 마무리까지 해버리는 것. 나는 양파와 마늘과 버섯을 조금 추가했다. 그냥 크림보다는 바질 크림이 맛있으니까 바질페스토도 잘 버무려준다. 20분이면 향긋한 초록빛 파스타가 완성된다.


서로에게 번갈아 밥상을 선물하는 요즘이다. 어제 현아의 한식대첩으로 인해 내 신체와 정신의 많은 부분이 채워졌음을 느낀다. 내 초록 파스타는 과연 무엇을 줄 수 있을까. 게다가 내가 먹는다고 샀던 죽기 직전의 샐러드가 최소한의 짭짤함만 더해진 채로 식탁에 올라왔는데. 걔는 과연 우리의 밸런스를 채워줄 수 있을까.


유럽에서 밥을 해먹다보니 샌드위치, 파스타, 피자, 샐러드, 햄버거를 오가는 서양인들의 식사 패턴을 이해하게 된다. 여기서는 할 수 있는 게 딱 그만큼이다. 마트에 가도 파스타 소스 말고는 소스 코너가 없으니까. 매콤하고 깊고 진한 무언가, 고소하고 눅진한 무언가. 인체를 다시 재생하고 가동시킬 만한 무언가가 부족해질 만한 곳이다.


어제보다는 조금 흐린 눈과 포크로 파스타를 집어먹은 후, 미래를 위한 계획을 잔뜩 늘어놓기로 한다. 곧 합류할 다른 친구와 함께 스위스 여행 계획을 짜기로 한 것이다. 크로아티아에서의 한달이 끝나면 동유럽을 쭉 돌고 나서, 서유럽을 돌고 스위스에서 마무리할 계획이다. 그래서 아직 미정인 곳도 스위스뿐이다.


스위스는 비싸기도 하지만 참 어려운 동네이다. 비싸서 어려운 동네이기도 하다. 오래 머물지 못할 테니까 그만큼 쌈박하게 놀아야 하고, 그러려면 많은 정보가 있어야 한다. 그 안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여러 교통권들을 자세히 알아보고 결정해서 구매할 노력이 필요하다. 아무래도 비싼 것들이 까다롭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스위스의 경치와 풍경은 그런 노력을 가능하게 한다. 다른 유럽 여행지를 쉽게 능가해버리는 자연의 모습을 가진 곳이다. 이 땅에 천국의 모형이 있다면 스위스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나 진짜 크리스천인데. 그러니 우리는 7시간의 시차를 두고도 줌으로 모여야 한다. 어떻게 하면 이 비싸고 광활한 도시를 요모조모 뜯어볼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한국의 저녁 9시, 크로아티아의 오후 2시. 흡사 유엔 회의 같은 비장한 구도로 세 여자가 모였다. 나와 현아는 한 화면에 등장하기로 했는데, 그로 인해 더 비장해져버렸다. 하루를 끝마쳐가는 한국 쪽의 얼굴은 왠지 더 포근해보였다. 이제 이 미팅이 끝나면 침대 속에 묻혀서 유튜브를 보다가 잠들 무렵 같았다. 우리는 이제 하루를 시작해야 한다. 왠지 모르게 선물 같기도 억울하기도 했다. 우리도 원래 그 시간에 속해있었는데.


스위스를 알아보다가 오후를 모두 보냈다. 하지만 여행을 해보니 가상의 준비 시간이 길어지는 만큼 실제 여행이 더 편안해진다. 준비 시간이 적어지면 실제로 딜레이되는 시간이 생기기 마련이다. 어느 쪽이든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면 되긴 한다. 하지만 스위스만큼은 조금 더 가상의 시간을 투자할 만하다. 사실 유럽 여행을 다녀온 친구가 아이러브스위스-가 적힌 티셔츠를 사다줄 만큼 스위스에 대한 기대가 컸기 때문이다.


초록빛이 주는 안정감이 있다. 괜히 냄새도 한번 맡고 드러눕고 싶어지는. 돌려깎기로 빚어낸 것 같은 알프스 산, 당장 빠져들고 싶은 에메랄드 빛의 호수를 자꾸 그리다보니 가보지도 전에 벌써 그리워진다. 동시에 카즈하 복근 운동을 하고 있다는 친구의 소식을 전해 들으며, 밀가루에 익숙해진 나의 입과 배를 떠올린다. 조금 위기감이 든다.


저녁마다 드라마를 보고 있다. 함께 시청한 두 번째 드라마가 끝나가는 중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사회적으로 아주 못생긴 여자 취급을 받던 주인공이 자신의 진가를 드러내고, 있는 그대로 사랑받고 사랑하게 되는 성장 드라마를 보면서 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건강하게 살빠진 나의 모습도 사랑하지만 그걸 위해 노력하는 나의 고단한 과정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


운동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귀찮다고 생각하며 미뤄두었으나 이제는 자의로 움직일 때가 왔다. 내일 스플리트 시내에 나가면 레깅스부터 사버려야겠다. 내일 레깅스를 사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오늘 운동을 시작하긴 했다.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니까 필요한 부분만 전략적으로 공략하기로 한다. 복부, 옆구리, 팔, 승마살 정도. 유튜브로 부분부분 모았더니 30분 정도 나온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오랜만에 몸을 과감하게 썼더니 조금 혈색이 돈다. 고이 쉬어주기만 하던 신체에 새로운 바람이 드는 것 같아 즐겁다. 아주 조금씩 꾸준히 무언가를 시도하고 있다. 읽고 쓰는 것, 강의를 듣는 것, 이제 운동하는 것까지. 모두 미래로 보내는 시간이다. 시간을 미래로 보내는데도 현재가 꽤 충만해진다. 어쩌면 성취의 감정은 현재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인지도 모른다. 떨어지는 콩고물들을 잘 받아 먹다 보면 많은 것들이 회복될 것 같다. 언젠가 신체와 정신이 모두 튼튼한 몸짱녀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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