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 할아버지를 만났다. 집에서 20분 거리에 있는 스타벅스를 가는 길이었다. 버스를 탈까, 잠시 고민했지만 아침이기도 하고 날씨도 선선하니 걸어보기로 했다. 5분 정도 걷자마자 조금 더워져서 바로 후회했지만…
집에서 카페까지는 아주 많은 횡단보도가 있었다. 직선으로 쭉 나가기만 하면 되지만 그만큼 자주 걸려서 멈춰서야 했다. 평소에도 자주 걷는 길이라 신호등의 매커니즘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무단횡단을 하지 않으면 매 신호등마다 멈춰야 하는 구조다.
만약 하나라도 신호를 어기고 건넌다면 막힘 없이 걸어올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한 동네에 십오년을 사는 동안 그런 일은 잘 일어나지 않았다. 알바에 늦지 않고서야 그렇게 급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충청도인의 천성인지도 모른다.
보통은 밤에 산책을 많이 한다. 저녁을 먹고 배부른 속을 달래기 위함이고, 시간을 조금 흘려보내기 위함이다. 아침에는 흘려보낼 시간이 잘 없다. 바쁘게 어딘가에 정착해서 글을 쓰거나 읽어야 한다. 오전과 오후에 여유를 부리면 죄책감 어린 저녁을 맛봐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의 출근길 혹은 산책길에는 동지가 한 분 계셨다. 단조로운 길이다보니 비슷한 아파트에서 출발한 분들은 몇 분간 같은 호흡으로 걷게 된다. 함께 멈췄다 갔다 엎어졌다 뒤처졌다…를 반복하다보면 목적지에 도착해있다. 혼자 걸어도 심심한데, 같이 걷는다고 덜 심심한 건 아니다. 이야기를 하면서 걸을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무지개 할아버지는 커다란 무지개 우산을 들고 계셨다. 몹시 큰 우산인데, 그걸 양산으로 쓰시는 건지 궁금했다. 나보다 키가 조금 작으시고 선글라스를 쓰셨는데, 걸음이 빠르셔서 나의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으셨다. 처음에는 커다란 무지개 우산에 뭐라도 숨겨놓으셨으면 어쩌지, 하고 걱정했다. 나를 해치지만 않았으면 하고 바랐다.
몇 번은 나를 쳐다보시는 것도 같았다. 횡단보도에 멈춰설 때마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조금 더 수상하게 느껴졌다. 한 번은 내 쪽으로 가까이 오시는 줄 알고 흠칫 놀랐는데, 내 쪽에 있는 버스정류장에 앉아 쉬시는 거였다. 빠른 걸음이라 피곤하실 만도 했다.
그러다 스타벅스에 도착하기 직전, 아가씨-하는 말이 들렸다. 주변엔 나밖에 없는데, 저 말씀이신가요?…
“아가씨하고 나하고 아주 먼! 길을 같이 왔네~“
함께 온 거리를 떠올렸다. 정말 적지 않았다. 어디를 가냐고 물으시길래 카페에 간다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정말 궁금해서 되물었다. 어디를 가시느냐고.
할아버지는 한시간 반 정도 산책하는 길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본인의 나이와 아내와 마음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다. 여든 다섯이시고, 아내가 아프시지만 본인이 수발을 들고 계신다며, 아래층에 아들과 며느리가 살지만 본인이 다 하고 계심을 강조하셨다. 우리 며느리에게는 잘 됐다며…
다들 요양원에 아내를 맡기라고 하지만, 함께 고생한 세월이 있는데 그럴 수가 없다고 하셨다. 서울에서부터 함께 새끼들 키워가며 고생한 건 워쩌냐고… 걸음만큼 빠른 호흡으로 말씀하셨다. 누군가 행복하냐고 묻는다면 행복하다고 하실 거랬다. 꼭 누가 묻지 않아도 많은 말씀을 하실 것 같았지만, 누군가 그의 하루를 꼭 물어주셨으면 했다. 그 분의 세월과 노력과 사랑 같은 것들이 듬뿍 느껴져서 개운했다. 정말 개운한 사랑 같았다.
나는 이따금씩 우와, 대단하시네요, 정말 정정하세요, 같은 말들을 추임새로 넣었다. 적당한 추임새만으로 충분히 흘러가는 대화였으므로… 할아버지는 자기보다 키 큰 놈들은 다 죽었다며, 작은 키의 강점 같은 걸 강조하셨다. 남자는 175, 여자는 165면 적당하다고… 저는 160이지만 할아버지만큼 말쑥-하게 살고 싶어요.
그가 건너야 하는 마지막 신호등 앞에 섰다. 나는 더 건너지 않고 오른쪽으로 꺾을 예정이었다. 저는 이쪽으로 갈게요, 하고 말하기가 아쉬웠다. 사실 이 아침부터 저를 뜨끈하게 데워주셔서 감사해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건강하라는 할아버지의 말씀에 (할아버지도) 건강하세요…라며 끝을 흐렸다.
흐릿하지 않은 대화를 흐릿하게 하는 건 내 쪽인 것 같았다. 이 분처럼 선명하고 호탕하게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까. 그 분의 걸음과 산책이 오랫동안 멈추지 않기를 바랐다. 진짜 건강하셨으면 좋겠어요, 라고 혼자 중얼거렸다. 60년 뒤의 나는 무엇을 돌보고 사랑하며 살고 있을까. 어쩐지 60년치의 지혜를 미리 전수받은 것 같았다.
무지개 할아버지를 생각할 수록 영화 노트북을 닮았다. 백전백승으로 나를 울게 하는 영화인데, 아주 오랜 사랑과 인생에 관한 내용이다. 오늘 저녁엔 산책 대신 그 영화를 봐야겠다고 생각한다. 변함 없는 사랑만으로도 누군가의 영웅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