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자취방에서의 첫날밤 한 줄 요약, 무진장 덥다.
내 방에 에어컨이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부랴부랴 검색해 설치를 예약했다. 그렇게 수원에서 수원으로 퇴근하는 첫날, 버스 배차 시간을 부지런히 확인하며 한 손에 들기는 버거운 선풍기를 감싸안고 집으로 왔다. 역시 다이소에서 자잘한 물품들을 사는 일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언제쯤 리스트에서 다이소가 완전히 사라질지 잘 모르겠다.
아직 에어컨 없이 살 수'는' 있지만 잘 살기는 어려운 듯하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창문을 열고 고이 모셔온 선풍기를 바로 켰는데, 어떤 풍랑도 일지 않았다. 껐다 켰다를 반복하며 페이스타임을 건 동생과 아빠에게 SOS를 요청했지만... 아빠는 무엇이든 일단 몇 대 시원하게 때려 보라는 말만 남기고 떠났다. 때리고 타일러도 움직일 기미가 없어 찬물 샤워를 감행했다.
샤워만이 주는 개운함. 아직은 커튼을 달지 않아 오랜 로망인 맨몸으로 집을 활보할 수는 없다. 근처 마트에서 정성껏 골라온 나시고랭을 후라이팬에 올려두고, 아직은 나도 잘 모르겠는 버튼들을 이것저것 만져보았다. 창문을 열어두었지만 여전히 바람이 들어오질 않아 조금 막막해졌다. 이토록 사무실을 그리워해 본 적이 있을까?
나시고랭을 먹으며 아이패드로 유튜브를 틀었다. 아직 냄비 받침이 없어서 입주 안내 책자를 냅다 깔았다. 사이즈가 맞지 않아 곤란했으나 플래너에 '다이소- 냄비 받침'을 추가해두었기 때문에 당장은 만족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도 자취방에서의 첫 식사니까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나시고랭을 참 좋아하는데 노브랜드 냉동 나시고랭은 곰곰 닭갈비 볶음밥 수준에도 미치지 못했다. 게다가 양이 적어... 같이 사 온 메밀 국수를 더 만들어 먹어야 했다. 물론 나는 대식가가 아니다.
나시고랭을 볶기 시작했을 땐 동생이 집을 보여달라며 페이스타임을 걸었다. 아빠와는 달리 이불이 마음에 든다며 호오~ 하고 부러운 기색을 내비쳤다. 부럽지? 부럽지? 부럽지? 겉으로 한 번, 속으로 두 번 정도 놀렸다. 밥을 절반 정도 먹고 메밀 국수를 만들기 시작했을 땐 남자친구에게 페이스톡을 걸었다. 거실에 나른하게 누워 있는 그를 보니 갑자기 집이 무척이나 그리워졌다. 내게 집은 사람인 걸까, 공간인 걸까... 여전히 모르겠다.
만약 집이었다면 유튜브보다는 디즈니 플러스로 모던 패밀리를 틀어두었을 것이다. 그저 배경 음악으로 틀어두고 인터넷 서핑을 시작한다. 밀려오는 파도를 막을 수 없다. 근래는 이사를 빌미로 오늘의 집을 하루에도 다섯 번씩 들락거렸는데 이제는 진짜 필요한 필수품이 어느 정도 구비된 것 같다. 오늘로 월세를 제외하고 총 80만 원이 들었다. 그 품목은 아래와 같다.
1차: 매트리스, 이불, 수건, 의자, 냄비, 드라이기
2차: 다이소 (청소 용품)
3차: 다이소 (생활 용품)
4차: 샴푸, 트리트먼트, 바디워시, 스킨, 로션, 클렌징오일
5차: 좌식 책상
6차: 침대 받침, 전자레인지, 햇반과 물 등 음식
이것 말고도 아직 남은 건 커튼과 에어컨이다. 원래는 예쁜 책장을 꼬옥 꼬옥 사고 싶었는데 둘 만한 공간도 마땅치 않고 아직은 필요하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미 책은 가져왔으니 언젠가 정말 필요하다면 사게 될 테다. 대망의 에어컨은 바로 내일 설치될 예정이다... 평생 사 본 물건 중에 가장 어렵고 복잡하고 비싼 것이라 알아보는 것만으로도 골치가 아팠다. 그래도 여러 가족의 도움을 받아 감사히 에어컨을 장만할 수 있었다.
사실 지금도 타이핑을 할수록 팔과 등에 땀이 생성되는 게 느껴진다. 오늘을 버티는 방법은 아빠가 짐 옮기는 날 채워두고 간 음료수들로 온몸을 차갑게 하기... 목에도 대고 팔다리에도 대고 있으면 신기하게도 더위가 물러간다. 물이 금방 미지근해지긴 하지만. 가장 좋은 위치는 냉동실에 넣어둔 음료를 다리 사이에 끼우고 앉는 것이다. 손을 쓰지 않아도 되면서 양쪽 다리를 모두 시원하게 유지할 수 있다.
내일 설치할 에어컨보다 더 기다려지는 건 친구 두 녀석이다. 이렇게 입주를 하자마자 손님을 받게 될지 몰랐지만 사실 한 달쯤 전부터 준비되어 있었던 것 같다. 친구들의 자취방에서 먹고 자고 일하고 떠들면서 도움을 받아온 세월이 벌써 6년은 되었다. 이제는 내가 친구들을 초대해 미리 준비한 토퍼를 놓아주고, 숟가락을 찾아주고 스킨 로션 위치를 큰소리로 일러줄 것이다.
나도 내가 준비되지 않을 줄 알았다. 회사도, 교회도, 자취도, 사랑도, 초대도... 그게 뭐든 완전히 준비된 상태로 뛰어드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내가?' 혹은 '지금?'을 외치면서 모험을 시작한다. 그것이 모험인 줄도 모르는 채로. 자기가 용감한 줄도 모르는 채로.
점심 시간에 보던 핑계고를 마저 봤다. 지석진 씨와 하하 씨는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고함을 쳤다. "MZ들아 니들 정말 부럽다~ 니들 얘기하는 거야, 멋진 놈들아!" 말 그대로 나를 가리키면서 외쳤다. 좋은 때는 좋은 줄 모르고, 아름다운 때는 아름다운 줄 모르는 젊음 속에서 나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걸까. '20대는 원래 혼란스러운 거'라는 주우재의 말을 기억하며 이토록 많은 질문들을 꼭 쥔다.
애써 답하지 않아도 언젠가는 희미해질 질문 앞에서. 그리고 희미해질 시간 앞에서 나는 이미 답을 받고 서 있는 것만 같다.
- 전입신고를 마친 첫 집에서의 첫 밤과 첫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