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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열음 Jul 24. 2024

반복과 정착

대망의 아빠와 짐 옮기기 프로젝트 당일이 되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두통적 인간인 아빠는 보란듯이 이사 전날부터 두통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내게는 호기롭게 정리한 캐리어 하나와 대왕 쇼핑백 3개, 초록색 이삿짐 상자 1개가 있었다. 만약 아빠와 가기를 포기한다면 다시 오빠에게 도움을 요청하거나... 아니면 그냥 이삿날을 미뤄야 했다.


그러기엔 오래전부터 정해두었던 날이었고, 아빠도 딱히 취소하자는 말이 없었다. 어쩌면 아픔으로 무언의 항의를 하고 있었던 걸지도 몰랐다... 여전히 굴하지 않고 어떻게든 될 거라 애써 믿으며 이삿날을 맞이했다. 청주- > 수원까지 예정 시간은 1시간 반 이상, 토요일이라 차가 막힐 걸 고려하고 저녁 찬양팀 연습 전에 돌아와야 한다는 걸 감안하면 8시 30분에는 출발을 해야 했다. 


"열시 넘었으니까 얼른 일어나~..."


일어나서 휴대폰을 보기까지 아빠가 열시라고 한 건지, 여덟시라고 한 건지 의심했다. 제발 후자여라, 제발...


이미 열시 반이었다. 시작이 살짝 꼬였지만 그래도 아빠의 몸 상태가 어제보다는 괜찮아 보였다. 어쩐지 아빠보다 이사를 더 걱정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에 걸렸다. 그래도 나이가 들면서 아빠 눈치를 덜 보게 됐다. 힘들수록 한 명이라도 기운을 채려야 하니까?


사실 난 빨리 씻기의 고수다. 씻고 화장까지 30분이면 거뜬하다. 떠들썩한 늦잠의 역사 덕분이다. 실은 고수까지는 아니고 그럭저럭 해낸다. 씻는 동안 나는 늦게 일어난 게으른 여자애가 아니라 무의식이 저지른 실수를 만회하는 책임감 있는 존재가 된다. 여하튼 빨리 씻고 나와서 출발했다는 뜻이다.


요즘 아빠가 즐겨 보는 드라마는 송혜교, 박보검 주연의 <남자친구>이다. 내가 프렌즈나 모던 패밀리를 통째로 10번씩 반복해서 보듯 아빠도 4번 정도 반복해서 봤다고 한다. 반복과 정착은 우리집의 오랜 기질이 분명하다. 수원을 올라가는 내내 너무 좋은 <남자친구> ost와 그럭저럭인 <태양의 후예> ost, 좀 별로인 <눈물의 여왕> ost를 들었다. 물론 아빠 피셜이다.


"드라마로 송혜교에 익숙해지다 보니까 이제는 전남편 그놈이 나쁜 놈 같어..."


아빠에게 들은 말 중에 제일 실없이 웃겼다. 이토록 편파적일 수가... 그의 컨디션을 체크하며 어쩐지 즐겁게 올라왔다. 내려오는 차가 얼마나 막히는지 보면서 잔뜩 겁을 먹은 채로. 자취방에 도착했는데 어쩐지 아빠가 더 익숙해보였다. 나는 두 번째 방문이고 아빠는 첫 번째 방문이었는데... 집에 들어선 순간부터 그는 전혀 어색해 보이지가 않았다. 나는 짐을 옮기느라 이리저리 부산스럽게 움직이기만 했는데 그는 창밖을 보면서 여유를 즐겼다. 싫지 않았다.


내 "남자친구"와 왔을 때는 그가 나보다 열정적으로 청소를 해주었는데... 내가 힘들다고 말하면 잠깐 쉬라고 말하던 남자친구와, 당연히 힘든 일이라고 말하는 아빠와의 간극에서 여전히 누구를 더 사랑해야 하나 저울질했다. 정확히는 누가 더 나를 사랑하는지 가늠한 것 같다. 오빠를 만난 후로 두 사랑의 크기를 가늠하는 일을 반복해 왔다. 어느 한쪽에 정착하기는 요원해 보인다.


짐 정리는 같이 안 해 줘도 아픈 머리를 이끌고 수원까지 와준 아빠나, 저녁 8시 반이면 졸리다고 잠들어 버리지만 연차 내고 청소해주는 오빠나... 이미 두 사람에게서 충분한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는 게 분명했다. 더는 가늠하지 않아도 될 만큼. 그리고 아빠와 오빠를 넘어서는 더 큰 사랑이 내게 있으니. 시간이 지날수록 이미 충분하다는 걸 깨닫고 있다.


애써 이사를 해도 사무실까지는 1시간이 걸리지만 그래도 평소보다 두 시간은 더 잘 수 있다. 버스까지 안 와서 15분을 걸어가야하겠지만 부족한 걸음수를 채울 수 있을 것이다. 어쩐지 학생 때부터 30분 이상씩 통근하고 있는데 참 절묘하다. 길에서 보내는 시간이야말로 내게 집중하고 하나님께 집중하는 시간이라서? 영상이나 도파민 없이 비로소 생각하는 내가 되는 순간이라서?


어느 쪽이 됐든 일단 난 수원에 짐을 풀었고, 월세도 냈고 매트리스도 주문했다. 의자도 왔고, 수건과 이불도 완전 내 컬러로 도착했다. 한눈에 모든 공간의 구석까지 스캔할 수 있는 이 작은 방에서 나는 비로소 내가 될 수 있을까. 여전히 두렵고 떨리지만 지난 여행의 기억으로부터 도움을 받는다. 낯선 땅에서 얕은 뿌리를 내리는 마음, 1년 전에도 캐리어를 이고 지고 다니며 숱하게 경험했던 일이다.


차이가 있다면 그때는 돈을 쓰기만 했지만 이제는 벌고 있다는 것. 여전히 글을 쓰지만 그때는 여행 에세이를 썼고, 이제는 이사 에세이를 쓰려 한다는 것. 아주 먼 곳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그리워했고, 지금도 여전히 같은 사람들이 그립지만 혼자라서 기쁘기도 하다는 것.


아빠와 본가로 내려오는 동안 차가 막히지 않는 루트를 찾아냈다. 무척 뿌듯한 마음으로 여전히 집인 곳을 향하면서 그가 말했다.


"다음에 내려올 때는 꼭 북진천 IC를 찍고 와야겠네."


아빠가 언제 다시 올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다시 올 거라는 거고, 확실한 건 아빠가 오지 않아도 이 집에 많은 손님이 오고갈 예정이라는 것이다. *호스트의 개인적인 바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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