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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열음 Jul 24. 2024

쇼핑과 산책

청소를 마친 후 며칠간 집을 묵혀두었다. 청소 후 입주까지 일주일. 생활에 꼭 필요한 물품들을 차곡차곡 택배로 보내두었다. 아무것도 없는 빈집에서 잠드는 것보단 집앞에 택배를 스무 개 정도 미리 보내놓는 게 나으니까… 한국인답게 옆집 사람들도 내 택배에 무관심하길 간절히 바라며 소중한 새 물건들을 보냈다. 이미 몇 달 전부터 장바구니에 넣었다 뺐다 추렸다 더했다를 반복한 것들이었다.


미리 주문해야만 했던 생활 밀착형 품목은 다음과 같다.


1. 매트리스 (제일 중요함)

2. 의자 (책상이 옵션이라 의자만 필요함)

3. 수건 (무형광이 정확히 뭐가 좋은지 모르지만 일단 10장)

4. 이불 (매트리스 커버, 베개 커버도 포함)

5. 냄비 (와 후라이팬)

6. 드라이기 (진짜 없으면 하루도 못 산다)


당장 사야 할 만한 물건인지를 고른 기준은 '없으면 하루도 못 사는지', '하루는 버텨도 이틀은 불가한지', '집에서 가져갈 수 없는지' 정도였다. 그 외에도 필요한 것들을 오늘의 집과 쿠팡과 올리브영과 다이소와 본가에서 차차 쇼핑하기로 했다. 체크리스트를 만들어 작은 성취를 누리는 동안 머릿속엔 체계라는 게 잡혔고… 어느 정도로 준비되었는지 퍼센트로 대충 짐작이 되었고… 그 과정이 조금은 짜릿한 게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가구 말고도 꼬옥 필요한 게 있었다. 자취가 아니라면 발도 담가본 적 없을 인터넷과 에어컨 설치. 인터넷을 설치하려고 '수원 인터넷 가입'을 검색하고… 속전속결로 예약을 마쳤다. 전화로 상담한 언니가 계약 내용을 읊어주는데 그야말로 AI인 줄 알았다. 마치 티비 보험 광고에서 아주 작게 쓰인 규약들을 읽어주는 목소리 같았달까…


아직은 수원에서 청주로 통근 중인 오늘,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친구와 접선해 다이소로 향했다. 적잖이 필요하지만 저렴하고 자잘한 물건들을 쓸어담기 위해서였다. 내일모레는 아빠와 짐을 옮기는 날이기 때문에 오늘이 아니면 기회가 없었다! 겸사겸사 친구와 마지막 평일 산책을 즐기기로 했다. 피곤과 더위에 찌들어있긴 했지만, 마지막 산책이라 그런지 날도 선선하고 체력도 남아 축복이 가득했다.


심심하고 배부르고 찌뿌둥한 저녁마다 서로를 소환하던 날들도 이제 안녕이다… 십오 년을 살았던 동네를 떠난다는 게 얼마나 큰일인가 했더니 더는 얘랑 산책하기 어렵다는 데서 절절하게 실감이 되었다. 가족과 오빠는 주말에 내려올 때마다 함께하겠지만 얘와의 산책은 시간이 그래도 넉넉할 때만 가능한 것이므로…


더는 화요일 저녁이나 목요일 저녁에 친구와 정처 없이 홈플러스를 떠돌 일은 없겠지만 또 어딘가에서 각자 부른 배를 달래며 산책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다이소에서 산 모든 물건을, 거뜬하지는 않지만 기꺼이 들어준 이 애와 어떤 방식으로든 연결되어 있을 테니까. 십오 년 전부터 이어져 온 우정과 동네와 산책을 마무리할 용기가 없어 평소보다 한 시간을 더 걸었다.


주변이 낯선 아파트와 영문 모를 풀과 영락없는 프랜차이즈 식당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나는 언제쯤 익숙한 산책을 즐길 수 있게 될까. 마음에 익은 곳을 두렴 없이 거닐 때 비로소 산책이란 게 가능하지 않나. 더는 새로운 풍경에 속하지 않고 모르는 길을 헤매지도 않을 무렵엔 새로운 친구와 함께 걷고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오늘 내 마지막이 되어준 친구와 못다한 산책을 이어가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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