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열음 Jul 24. 2024

짐. 짐. 짐. 짐, 집

짐을 쌌다. '본격적으로 짐을 싸는' 날은 오늘이었지만 사실은 며칠간에 걸쳐 쌓아왔다. 어쩌면 짐은 싸는 게 아니라 쌓는 것일지도. 20인치 캐리어와 28인치 캐리어 중 호기롭게 작은 편을 택했다. 짐을 싸던 도중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지만 이미 자잘한 수십 개의 소품들이 한면을 메우고 있었다. 이제와 교체하기엔 너무 멀리 온 것이었다.


1년 전 장기여행을 준비하던 때처럼 거실 한가운데 캐리어를 펼쳐두고 생활을, 일상을 복제하려 노력했다. 그래도 첫 유럽여행의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되었다. 특히 쓰지도 않을 거면서 혹시 몰라 챙기는 것. 지난 여행에서는 속눈썹 영양제와 앞머리 고정액이 그랬다. 진짜 꼬옥 필요한 것만 챙기는 게 이토록 어려운 일이라니.


새 짐을 사는 건 리스트로 작성했지만 헌 짐을 싸는 건 머릿속에서만 정리했다. 다만 구획을 나누고 시뮬레이션을 3번 정도 돌렸다. 주방에선 요것을, 책상에선 이만큼을, 옷장에선 이 정도… 스윽 하면 돼.


남자친구에게 대왕 플라스틱 이사 박스를 빌리기로 했다. 박스 두개에 옷과 신발과 그릇과 휴지 등을 담고 캐리어에 책과 세면용품 등을 담을 요량이었다. 정확히 무엇을 담을지는 모르지만 버겁게 상자를 옮기는 나와 아빠의 모습이 절로 상상 되었다. 둘다 웃지는 않아도 두려움과 설렘이 죄책감처럼 서린 표정일 것이다. 실제로 아빠는 수원을 오가며 운전하고 짐을 나를 생각에 두려워하긴 했다. 물론 첫째딸의 첫 자취가 두렵기도 할 테지만.


주방에서 그릇과 컵과 각종 가루들을 훔쳤다. 이미 싼 것만으로도 충분히 무겁지만 지금이 아니면 온몸에 이고지고 주말을 보낼 것이 분명하니 한번에 옮기는 편이 낫다. 지인들에게 받은 미국물 먹은 시리얼 그릇과 크리스마스 컵, 일본 스벅 컵 등을 허술하게 포갰다. 그것들이 내 손에 있는 한, 혼자 지내는 방에서도 결코 혼자이지 않을 게 분명했다.


옷을 싸는 건 생각만큼 쉬웠다. 일단 여름 옷이 별로 없기도 했고, 그래서 가볍고 간편하기도 했다. 옷걸이째로 쓸어담아 애착 신발 다섯 켤레 위에 얹어두었다. 맨날 입는 바지와 치마군도 너무나 선명했기에 고민 없이 집어들었다. 옷은 언제나 조합의 문제였으므로… 위아래를 교묘하게 바꿔 입을 수만 있다면 개수가 적어도 꽤 오래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이십오 년간 사용하던 책상에서 가져갈 것은 오로지 책뿐이었다. 옛날부터 꽂혀있는데 언제 펼지 모르는 것들...은 미안하지만 쳐다도 보지 않았다. 버려야 하나? 그래도 언제 읽을지 몰라... 아직 읽지 않았거나, 읽다 말았거나, 언젠가 읽을 다수의 책들. 그리고 몇 번을 읽었어도 다시 읽을 소수의 책들을 무심히 집어들었다. 약 스무 권 정도 되었다. 티비가 없는 작은 방에서 지금보다는 더 자주 책을 펼치기를 바랄 뿐이다.


20인치 캐리어 하나, 출처를 알 수 없지만 본가에 하나씩 있는 튼튼한 비닐 가방, 다이소 쇼핑백, 출근용 백팩, 그리고 남자친구 대신 친구가 빌려준 이사 박스를 채웠다. 계획하고 꾸려서 담는 일이 내게 작은 스트레스이자 큰 기쁨이라는 걸 이사하면서 분명히 깨달았다. 같은 내용을 짐이 아닌 글로 바꾸면 편집자의 일이 된다는 사실을 쓰면서 깨달았다. 놀랍다...


비가 오지 않는 토요일 아침, 이 모든 짐을 싣고 수원으로 떠난다. 결코 나를 대신할 수 없는 짐들, 그렇다고 나이지는 않은 것들, 나이길 바라는 것들과 동고동락할 날들이 머지 않았다. 괴로움도 즐거움도 지지고 볶으며 진해질 테니. 혼자이지만 결코 혼자이지 않을 테니, 그래서 두렵고 두렵지 않다.

작가의 이전글 쇼핑과 산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