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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열음 Aug 03. 2024

새 집에는 새 수다를

초대짱 : 입주한 지 하루밖에 안 되었지만 우리집에 와줄래?


그렇다. 자취방 생활이 심심하다는 걸 단 하루 만에 깨달아 고새 친구들을 불렀다. 진짜 될까, 싶은 마음으로 초대했는데 이게 된다. 당장 다음주에 첫 출근을 해야 하는 친구가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출근을 앞둔 며칠의 평일은 다시 오지 않는 소중한 것이니까...


그 애들이 오기 전까지 나는 단 하나의 임무만 수행하면 되었다. 에어컨 달기. 7월 중순, 에어컨 없이는 끈적한 장마를 통과할 수 없었다. 친구들이 여기까지 왔다가 다시 집에 가고 싶어지면 안 된다. 심지어 서울이나 청주에서 오기에 편안한 위치도 아니다... 최소 한두 번의 환승을 사랑과 우정으로 감내해야만 한다.


다행히 내가 퇴근하기 전까지, 그리고 에어컨을 설치하기 전까지 친구들이 '가볼 만한 곳'들이 있었다. 행궁동이라든지... 스타필드라든지... 아직 나도 누리지 않은 것들이다. 그 애들이 밖에서 8시간만 잘 버텨주기를 바라고 있는데, 갑자기 에어컨 설치 기사님이 한 시간을 늦는다고 하셨다. 오히려 나는 조금 더 일찍 와 달라고 연락을 드렸는데 정말 irony 말도 안 돼~

 

조급하고 미안하고 복잡한 마음에 허둥대는 나와 달리 친구들은 간결하게 괜찮다는 답을 남겼다. 스타필드에서 아예 먹을 걸 포장해오겠다는 따뜻한 말과 함께... 어떤 음식을 마침내 선택할지, 그리고 그걸 고르는 애들이 얼마나 즐거워할지 다행히 기대가 되었다. 그날 저녁, 하자 보수 기사님과 에어컨 기사님이 교차로 오가는 동안 나는 활짝 열린 창문과 현관문 사이로 부딪히는 시원한 맞바람을 맞으며 긴장을 풀었다. 이래저래 마음이 쓰였던 것이다.


그래도 그런 것에 굴하지 않고 즐거워하는 친구들이 도착하자 마침내 나는 완전히 긴장이 풀렸다. 그 애들의 얼굴을 보는 순간 오늘밤이 무척이나 즐거울 거라는 사실을 예감했기 때문이다. 벌써부터 호스트 행세를 하는 나를 조금 어색해하며, 그리고 많이 웃겨 하며 애들이 입장했다. 이 좁은 방에서 여자 셋이 얼마나 많은 말들을 쏟아내게 될까.


애들이 고르고 고른 음식은 개커다란 폭립과 싱싱한 모듬회... 에어컨 같은 중대사안을 신경 쓰느라 미처 마련하지 못한 식탁 대신, 택배 상자 두 개를 바닥에 깔았다. 어마어마한 양의 쌈채소는 마루 위에 놓였다. 야심차게 집에서 가져온 컵 세 개가 드디어 제 짝을 찾아갔다. 아직 숟가락과 젓가락 세트가 2개뿐이라 한 명은 자진해서 포크로 먹어야 했다. 이제와 생각해 보니 집주인인 내가 뺏어서라도 포크를 썼어야 했다.


폭립과 회의 조합은 처음이었지만 당연히 맛있었다. 신나게 먹던 중에 갑자기 한 친구가 입술이 아프다고 말했다. 왠지 좀 부은 것 같지 않냐며 보여주는데 원래도 도톰한 입술이라 별일 아닌 줄 알았다... 바로 다음주에 첫 출근을 해야 해서 어쩌면 몸이 먼저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던 걸까. 점점 상태가 안 좋아져서 비를 뚫고 약을 사러 가기로 했다.


다행히 수원도 나름 수도권이라... 조금만 걸어가면 늦게까지 하는 약국이 있었다. 산책 비슷하게 동네를 걷는 것은 처음인데 애들과 함께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생각보다 더한 쫄보라 밤에 한산한 거리를 걷는 것조차 무섭다. 아무리 생각해도 현아가 아니었다면 유럽도 못 다녀왔지 싶다. 평소라면 지나쳤을 불 켜진 약국에 감사한 마음으로 헐레벌떡 들어섰다.


친절한 약국 언니의 도움 덕에 도톰해진 친구의 입술 위로 덕지덕지 하얀 약이 발렸다. 돌아올 때는 빗속을 15분간 걸을 엄두가 나지 않아 택시를 타고 말았다. 기사님이 이 정도는 걸어 다니는 게 어떻겠냐고 하셔서 민망했다. 저희 환자가 있어요... 핑계처럼 읊조렸다.


다행히 입술에 약을 얹어도 신나게 떠들 수는 있었다. 떠들기 위해, 혹은 잠들기 위해 멀끔히 씻었다. 온갖 웃긴 유튜브, 새로 나온 말도 안 되는 노래, 가족 얘기, 사는 얘기 등등을 쏟아냈다. 살아온 얘기를 하고 있었지만 실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를 고민한 것이기도 했다. 오늘이 지나면 우리는 다시 서울로, 청주로, 수원으로 흩어지겠지만 그럼에도 다시 만나 떠들 얘기를 차곡차곡 쌓는 중이라고 생각하면 삶이 훨씬 수월해질 것이다. 채우고 비우고를 반복하다 보면 더 멀끔한 마음들이 남을 것 같았다.


어쩌면 입주 하루 만에 애들이 와 주었기 때문에, 집을 조금 더 가까이 느끼게 됐다. 첫날에는 에어컨이 없어서 더웠을 뿐만 아니라 조금 외롭고 무섭고 두렵기도 했는데, 단 하루 만에 애들과 놀고 먹은 숙소에 살게 되었다. 새 집에는 새 수다가 필요하다. 혼자 방에 있는 동안에는 내 목소리보다 영상 소음이나 타이핑 소음만 낭자할 테니까.


애들이 남기고 간 고구마빵과 감자칩을 꺼내 먹으며 더 이상 이 집의 손님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아주 조용히 있어도, 시끄럽게 울어도, 맨몸으로 걸어도 아무렇지 않은 공간을 마침내 가졌을 뿐이다. 결코 평범하지 않은 행복을 평범하게 누리게 된 것이다. 과연 집이 더한 축복인지, 우정이 더한 축복인지 몰라도 아무튼 어떠한 축복을 받은 게 틀림 없는 날들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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