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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열음 Sep 21. 2024

한번쯤은 외로워도 혼자이고 싶었어

오늘로 10일째 자취방을 비워두고 있다. 추석 연휴를 끼고 두 번의 주말을 모두 본가에서 보낼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목요일에 자취방을 떠나왔으니까 다음주 화요일에 다시 돌아가면 약 12일 정도… 이쯤 되면 나는 그냥 본가 생활자에 세미 자취인 정도가 아닐까. 어디 가서 자취한다고 말하기 조금 민망하다.


추석 끝난 다음날은 청주-수원 통근, 금요일 재택, 주말 놀고 다시 월요일 재택. 아직도 내가 직장인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 이유이다. 나를 들이고 처음으로 길게 비어있는 집을 생각하면 어쩐지 미안하다. 더 잘해주지 못해 미안해… 반쯤 걸쳐 있는 나라서 또 미안해… 본가에 내려오기 전 처리하지 못한 빨랫감이 아른거린다.



자취한 지 약 한 달이 흘렀다. 누군가 혼자 사는 게 어떠냐고 물으면 이제는 얼추 적응이 됐다고 말한다. 처음 일주일 정도는 좀 어리둥절했고, 그 다음 일 주는 심심했고, 그 다음 일 주부터는 그런 걸 느낄 새 없이 피곤했다. 자취방에 들어온 날부터 지금까지 매일 반복하는 건 잠들기 전 기도와 찰나의 유튜브 보기. 매일 기도를 마치고 비로소 밤다운 밤이 시작될 때, 익숙한 유튜브를 틀어두곤 했다. 조용히 보다가 스르륵 잠들기 위해서였다.


아직도 혼자인 어둠을 무서워한다. 무척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친구들과 함께 파자마 파티를 해도 내가 제일 먼저 잠들기를 바랄 만큼, 그 애들이 얼마나 즐거운 얘기를 하든 상관 없었다. 마지막에 남는 사람이, 어둠을 혼자 쓸쓸히 맞는 사람이 내가 아니면 되었다. 열 살 때부터 친구네서 외박을 하기 시작했는데, 혼자 남은 밤엔 터무니없이 눈물이 났다. 할머니댁에서도 티비에 취침예약을 걸어두고 제발 오늘은 잠이 솔솔 오길 빌었다. 나보다 6살 어린 사촌 동생이 옆에서 티비를 보다 자겠다고 하면 내심 기뻐하는 못난 사촌 언니였다.


스물여섯이 된 지금은 유튜브를 보다가 졸릴 때쯤 턱 하고 꺼버린다. 어둠보다 피곤이 먼저인 것이다. 어둠이 덜 무서워질수록 어른에 곧장 가까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 소리 없는 집도 밤도 어둠도 금세 익숙해졌다. 때때로 외로웠지만 대부분은 충만하다고 생각했다. 아무런 소음도 없는 곳에서 책을 읽고 노래를 하고 눈물을 흘리며 나는 또 다른 내가 되었다. 그건 밤이 무섭다고 울지 않는, 취침 예약을 걸지 않는, 어쩌면 남을 위해 마지막에 잠들겠다고 배려하는 누군가를 향해 가는 길이 분명했다.



얼마 전에도 새 집에 놓을 비누 받침과 락앤락 등을 사기 위해 다이소에 다녀왔다. 집을 위한 물품은 왜 사도 사도 끝이 보이지 않는가. 그럼에도 아직 우리집 수납은 텅텅 비어있다. 수납이 적은 공공 아파트인데도 불구하고 생각만큼 짐이 많지는 않았던 것이다. 한 친구는 집을 자주 비워 애정이 적을수록 물건을 덜 놓게 된다고 말했다. 마음을 쓰지 않는다는 건 부피로 표현되는 일일지도 몰랐다.


몇 주 전, 큰 이모부네 장례식에서 오랜만에 가족들을 뵀다. 이모와 이모부들, 삼촌과 숙모를 다같이 대면한 게 얼마 만인지 모른다. 이모부의 죽음 앞에서 모두가 나의 취업과 수척한 얼굴과 자취 생활을 염려했다. 왜 이렇게 얼굴이 핼쓱하냐며, 혼자 살아서 그런 거냐고 묻는 친척들 앞에서 나는 실없이 웃을 수밖에 없었다. 자취방에선 흠 잡을 데 없이 잘 해먹고 많이 먹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살이 빠졌다면 오히려 매주 5시간씩 통근하는 게 유력한 이유같다.


나를 가장 사랑하는 셋째이모는 아무도 못 들을 때 조용히 속삭였다. “일주일에 한번씩이면 너무 자주 내려가는 거 아니야?.. 좀 떨어져도 있어 봐야 하는 거 아니야~..” 이모의 세심한 말은 늘 말줄임표로 떨어진다. ‘어~ 승희야~.. 밥은 먹었니~.. 일은 할 만하고~..’ 내게 자취를 왜 하냐고 묻는 어른은 있었어도, 혼자일 줄 알아야 한다는 어른은 처음이라서 감사했다. 한번쯤은 외로워도 혼자이고 싶었어요.



일주일에 3일을 본가에 있다고 해도, 이제는 자취인이 되었다는 데 방점을 찍어본다. 내 몸 한 구석이 이제는 혼자인 방을 그리워한다는 걸 안다. 문을 열면 한 눈에 담기는 작은 집, 그 속에 작은 나, 오롯한 삶이 있다. 선물 받은 디퓨저 냄새가 방안을 가득 메운다. 그곳과 비슷한 향을 맡을 때마다 내 작은 방으로 즉시 다이빙하는 기분이다. 자취하기 전과 후의 가장 큰 차이는 아무리 떠돌아도 돌아갈 곳이, 혼자 슬퍼하고 노래하고 기도할 곳이 있다는 사실 자체이다.


그건 보이지 않는 믿음이지만 몸에 새겨진 감각이기도 하다. 믿음과 감각은 어떤 방식으로든 연결되어 있다. 감각이 쌓일수록 믿음은 짙어지고, 믿음이 진해질수록 감각은 선명해진다. 집이 아닌 곳에서 집을 그리워하다 보면 그곳은 더이상 빈 집이 아니다. 오직 나와 나의 하나님으로 가득한 공간, 어디를 가든 나는 그곳에 속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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