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부러워하는 재택 근무중.
월요일 혹은 금요일마다 나는 기세가 등등해진다. 제대로 된 출근으로 건너가는 길목에 선 기분이다. 집에서 일할 땐 9시 50분 기상, 10시 출근이 가능한 기적을 맛본다. 재택 전날엔 이런 상상도 해 본다. 출근 한 시간 전에 일어나서 개운하게 운동하고 씻고, 스트레칭을 좀 한 뒤에 멋지게 출근-.. 아직까진 상상에 불과하다.
모든 일에 준비가 필요한 나지만, 출근만큼은 준비 없이 뛰어든다. 처음 6개월까지는 바로 일을 시작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9개월 차인 지금은 그냥 일을 바로 시작하려는 욕심을 버렸다. 웜업 시간을 줄이기도 했고, 일이 어느 정도 몸에 익었기 때문이다. 카페에서 일할 때와 비슷하다. 10분 만에 출근을 준비하는 나는 세안 밴드를 머리에 꽂은 채로, 나와 나이가 같은 책상에 앉아 안경을 끼고 노트북을 편다. 여기까지는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 눈을 감고도 할 수 있다.
노트북은 항상 완충 상태여야 한다. 책상에선 충전이 불가하기 때문이다. 방의 구조 덕분에 미리 충전해 놓는 습관을 들여야 했다. 노트북을 열면 바로 메모장으로 다이빙한다. 매일 작성하는 업무 투두 리스트를 펼치면 단숨에 회사로 소속된다. 기록하지 않았다면 얼마나 많은 걸 놓치고 살았을까. 때로는 쓸데없는 것까지 붙잡게 되긴 하지만 그렇다고 기록을 멈출 수는 없다.
어제 완료한 업무들을 다시 한번 복기하며 오늘의 업무를 세팅한다. 매일 반복하는 업무들은 체크 표시만 해제하고 그대로 둔다. 보통 오전에는 SNS 관련 마케팅 업무를 쳐내고, 오후부터는 편집 업무를 맡는다.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 재택 근무를 할 뿐만 아니라 하루에 한 시간씩 근무 시간이 적다. 게다가 유연 근무제까지... 10시에 출근하면 6시에 퇴근하고, 9시반에 출근하면 5시 반에 퇴근한다. 대표님 감사합니다.
오전에 하는 마케팅 업무는 특히 더 반복적이다. 매일 책 관련 콘텐츠를 한 건씩 만들어고, 본문을 발췌한 피드를 2건씩 업로드한다. 모두 3개의 계정을 핸들링하는데 과연 유효하게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꼭 광고 효과를 얻지 못해도 아카이브용으로 기능하게 한다. 그것이 우리 계정들의 목적... 여튼 아카이브까지 다양한 방면으로 기록의 효능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다 보면 금세 점심 시간. 대체로 시간 분배는 오전 3시간, 오후 4시간 정도로 한다. 점심 시간도 내가 알아서 다녀오면 된다. 처음엔 "점심 다녀오겠습니다."로 시작해서 "점심 다녀왔습니다."로 맺어지는 카톡 사이에 부랴부랴 식사를 했지만, 지금은 그냥 알아서 조용히... 먹고 잘 돌아온다. 같이 일한 시간이 쌓인다는 건 알아서 해낼 거라는 믿음이 쌓이는 것이기도 하니까.
오전 업무는 비교적 가볍게 스쳐가지만, 오후가 되면 나는 조금 더 어엿해진다. '그래, 편집이 내 일이다' 쯤의 마인드로 약 서너 명의 작가와 작업을 이어간다. 어떤 작가는 함께 원고를 수정하고, 다른 작가와는 참고 도서를 읽고 있으며, 또 누군가는 교정교열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지극히 독립적이지만 다분히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지는 작업들... 또렷한 집중력으로 세 권을 핸들링해야 한다. 역시 잘 해내고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오전과 오후의 체계, 각각 비슷하게 흘러가는 작업 순서, 체계 속의 체계 속의 체계... 9개월 간 만드는지도 모르게 만든 과정이다. 그러나 우리 대표님처럼 캐파를 넘어서는 작업량을 마주하면 모든 계획이 무산될지 모른다. 그는 이제 계획이 무용한 지경이라고 한다. 원래도 계획을 촘촘하게 세우시는 분은 아니지만 어쨌건 손에 쥘 수 없다고 생각하신다. 대표님을 생각하면 <인사이드 아웃> 불안이가 빙빙 도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전혀 불안해보이시진 않지만 그렇게 빨리 회전하는 모습만이 그려진다. 그분 곁에서 나는 내 계획을 착실히 따르며 가끔씩 빈 공간에 떨어지는 업무들을 처리하는 수밖에 없다.
더 바쁜 건 대표님인데 자주 불안해하는 건 내 몫이다. 가끔 알아서 해낼 수 없는데 알아서 해내라고 하실 때마다 나는 기쁨을 잃고 금세 초조한 아이가 된다. 질문을 선별해 꼭 필요한 것만 묻고 한숨을 무겁게 쉰 뒤, 투두 리스트에 겨우겨우 새 항목을 추가한다.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업무는 가능한 한 미루게 된다. 어느 순간 '이제 진짜 해야 할 때다' 싶으면 오전 일찍부터 해치워버린다. 싫은 건 최대로 미뤘다가도 진짜 할 때는 속전속결로 해치우기. 기피하는 동안 수차례 상상과 시뮬레이션을 거쳤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오늘은 계획했던 일을 하나 빼고 모두 마쳤다. 숏츠를 넘기듯 쫓기며 일을 하는 날이 있고, 한 시간짜리 브이로그를 볼 때처럼 넉넉하게 하는 날도 있다. 잡다한 일들을 마구잡이식으로 한 날에는 일을 마치고도 얼이 빠져 있다. 잡다하지 않게 밀도가 높은 날엔 뿌듯함도 배가 된다. 오늘은 다행히 후자 쪽에 가까운 날이었다. 그러니 일을 마치자마자 글을 쓸 여유가 있었던 것이다.
추석이라는 긴 휴식이 끝나고, 다시 10월 첫 주의 퐁당퐁당 휴식을 앞둔 이 시점에서 나는 완충된 노트북이 된 기분이다. 지나온 안식과 다가올 휴식 사이에서 나는 일이 전부가 아닌 사람이 된다. 일하기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니라 살기 위해 일하는 사람 편에 선다. 노트북을 미리 충전하듯 적절한 휴식을 심어줘야 일을 지속할 수 있다. 퇴근하고도 가뿐한 상태가 오래 지속될 수 있다면.
내일은 다시 사무실로 출근이다. 오랜만에 대표님을 만나고 또 오랜만에 필라테스와 자취방을 찾는다. 그곳에 차려 놓은 새 일상도 점점 체계를 잡아가는 중이다. 사무실 앞에서 매번 사먹는 더벤티 라떼가 조금 그리워진다. 매일 곁에 있을 때는 오히려 지겹다고 생각했는데. 조금의 재택이, 조금의 휴식이, 조금의 공간이 대부분의 일상을 지탱하며 굴러가게 한다. 이제 나도 그런 '조금'들에 기대어 하루를 마무리하는 보통의 사람이 되었나 보다.
2024.09.23. 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