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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른 생명이 붙는 바람에

by 최열음

한강의 책을 샀다. 아주 귀여운 꾸밈체로 쓰인 제목, 어둠과 빛의 대비가 선명한 책을.


인생 최초로 혼자 여행을 떠나 이 책을 샀다. 처음부터 살 생각은 없었다. 다만 꼭 가고 싶었던 속초의 서점이 있었고, 초면이래두 모든 서점이 오래 버티길 바라는 마음으로 한 권 사야겠다는 결심이었다.


시가 없는 인생을 너무 오래 살아온 듯했다. 지금은 시집이 재밌을락 말락하는 시기다. 시를 찾게 되는 마음은 무엇일까. 삶을 축약해서 보고 싶은 걸까, 지독하게 관통하고 싶은 걸까. 내가 갖지 못한 아픔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인들의 시선을 질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지극한 일반인이라서.


서점의 이름은 <완벽한 날들>. 메리 올리버라는 작가의 책 제목을 따온 것이랬다. 속초에 가기 아주 오래전부터 그 서점만은 내 위시리스트에 있었다. 첫 여행의 목적지가 속초와 고성일 줄은 몰랐다. 속초는 주현의 고향이다. 푸른 바다의 동네에서 온 주현을 동경하기에 언젠가는 그곳에 갈 거라고 믿었다. 그곳에 간다면 이 서점은 무조건 들를 거라는 것도 알았다.


각종 시집들을 살펴 보다가 입구에 가장 가까이 놓인 익숙한 표지를 맞닥뜨렸다. 마치 사고처럼 책과 눈이 부딪혀 홀린듯이 집어들었다. 언젠가는 샀어야 할 책이다. 한강에 대한 애정도, 이 서점에 대한 애정도 중간쯤이었으므로 별 고민 없이 책을 사서 장바구니에 넣었다. 정확히는 누룽지오징어순대와 닭강정 사이에 책을 받쳐 두었다. 그건 내가 집으로 돌아가 사랑하는 두 사람에게 먹일 음식이었고, 여행에서 돌아오는 내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일이었다.


갓 구운 누룽지오징어순대가 어제부터 포장해둔 닭강정을 덥히기라도 할까봐. 그래서 상하기라도 할까봐. 오직 그것만이 걱정되었다. 속초에서 내려오는 5시간 동안 나는 그 기름 냄새, 질리게 고소한 냄새와 함께 했다. 지난밤부터 어딜 가든 생명의 냄새가 나를 졸졸 쫓아다녔다. 다행히 새로 산 책으로 두 음식 사이를 막아 두었으니, 더는 열이 전이될 걱정은 없었다. 책의 주인에게 크게 미안하지는 않았다.


집에 오자마자 음식들을 깔아놓고, 책에 묻은 기름을 닦았다. 혹시라도 뭐가 묻을지 모른다고 짐작은 했지만 기름이 표지에 배일 것까지는 생각지 못했다. 조금 아쉬운 마음으로 표지와 띠지를 벅벅 문질렀다. 물티슈로 닦고 소독제로 닦았다. 몇번이고 그걸 닦으면서, 그리고 짙게 배인 기름 냄새를 맡으면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속초에서 온 음식을 먹는 아빠가 크게 맛있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전했을 때 정말 허탈했다. 그게 왜 그렇게 절망적이었는지 나는 평소답지 않게 큰 소리로 답했다. “그럼 먹지마! 내가 이거 얼마나 힘들게 가져왔는데.” 그 후에도 아빠는 먹을 수 있는 만큼 먹었고, 저녁을 지나친 나는 남은 김치찌개와 함께 음식을 처리했다.


다음날, 나는 책에 묻은 기름을 다시 한번 닦았다. 표지와 띠지의 보이는 부분은 어제 모두 손 봤지만, 띠지 안에 숨은 부분까지도 축축했기 때문이다. 띠지를 열고 그 안을 닦으며 나는 울 것 같은 마음이 되었다. 한강 작가가 소설들을 써 내기까지 어떤 고통을 통과해왔는지, 왜 그래야만 했는지를 아주 조금 읽은 참이었다. 미안해… 미안해… 속죄하는 마음으로 문질렀다. 돌아가도 난 같은 선택을 했을 거였다.


사랑하는 사람을 잘 먹이고 싶은 마음이 사랑 아니겠냐고, 어떤 책에서 본 기억이 있다. 그 마음이 부정당했을 때 나는 왜 그토록 아파했을까. 이미 최선을 다했으니 맛이 없는 건 아쉬운 일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을까.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에게 왜 매번 실망하는 걸까. 이기적이야. 아빠는 사실 나를 먹이려고 알이 가장 큰 딸기를 사오고, 먹지도 않던 포카칩을 묶음으로 들이고, 투게더 대신 고급져보이는 칙촉 위즐을 사오는 사람이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사랑을 실천할 뿐이다. 그 사랑이 안으로 깊어지는지 밖으로 뻗어나가는지, 세계를 이해하려는 간절한 마음으로 글을 쓰는지, 불편을 감수하고서라도 먹이려 하는지, 그저 자신의 생각을 솔직히 이야기하는지… 애석하게도 모양이 그토록 다양해서 해석하는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타인을 끝까지 이해할 수는 없다. 나의 시선을 통해 본 타인은 내가 인식하는 타인일 뿐이다. 그게 그 사람의 전부일 거라고 생각했다가는 세상이 너무 무료하게 느껴질 것이다. 나는 단편적인 삶을 살고 싶지 않다. 사람이라는 알 수 없는 생명을 나만의 방식으로 이해하고 싶다. 비록 시같지 않은 글이라고 해도.


한강 작가님은 세계와 폭력과 고통을 바라보는 글을 쓴다. 그가 삶을 통과하는 방식이고 그만의 사랑을 실천하는 방식 같다. 기괴할 정도로 아프고 아프고 아픈 사람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치유의 물꼬가 트인다는 게 신기할 뿐이다. 어떻게 한 인간이 이토록 폭력적일 수 있을까, 어떻게 한 인간이 이토록 헌신적일 수 있을까. 그 양면성, 간사함, 거짓, 사랑, 진실이 모두 나의 것이다.


책에서는 아직도 기름 냄새가 난다. 그가 생명을 다해 쓴 책에 또다른 생명의 냄새가 붙었다. 엄밀히는 죽은 생명이다. 기름에 튀겨지고 붉어지고 튀어오르고 벗겨진 생명. 이 책을 소장하는 내내 이번 여행의 기억을, 절망의 순간을, 환희의 기쁨을 잊지 않을 것이다.




*이번 여행에서 환희의 기쁨에 해당하는 순간은 아직 쓰여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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