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일기
퇴사 14일차.
아직도 2주밖에 안 지났다. 오늘은 출판사 다닐 때부터 가려고 했던 도서전에 가기로 했다. 원래는 회사에서 보내준다고 가서 잘 보고 리포트 쓰라고 하셨는데, 이제 편집자님이랑 그냥 돈 내고 가서 방관하고 오려고 한다*^^*
편집자님과는 약 3주 만에 만났다. 평소에 맨날 둘이 붙어있었어서 그런지 오랜만에 만난 것 같지가 않았다. 둘이서 밥 먹고 카페 가고 하품하고 산책하고 젤리 사먹고 일하던 날들 덕분이다.
쌓인 이야기가 없을 만큼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사람과 밖에서 만나니 새롭다. 그간 누구와 하지 못한 회사 이야기들, 그새 또 무슨 이슈가 있었는지 나눴다. 둘다 권고사직 당했다가 권고사직을 번복당하고 이제는 진절머리를 낸다. 남의 책을 파는 남의 행사에서 우린 서로에게만 동질감을 느낀다.
도서전엔 2년 만이다. 작년에 정말 사람이 많았다던데 일하느라 별로 가볼 생각이 없었다. 올해도 많긴 한데 작년만큼은 아닐 것 같다. 제작년에 가장 화려했던 안전가옥이 올해는 없지만, 유명한 출판사들은 여전히 눈에 띈다. 문학과 지성사는 종이 박스를 조립한 형태의 구조물을 부스로 사용하고, 밀리의 서재는 공항 입국 시스템처럼, 문학동네는 문인들의 얼굴을 타일처럼 박아두었다. 알라딘 중고서점은 우주 컨셉의 카페를 운영한다. 알라딘 지점들에서 직원들을 차출했다고 들었다.
최근 유퀴즈에 출연해 화제가 된 박정민 배우의 무제는 별다른 홍보 없이도 사람이 득실득실하다. 그러나 메인홀 한가운데가 완전히 막힐 만큼, 그래서 건너가지도 못할 만큼 사람이 몰린 곳은 다름 아닌 평산책방. 문재인 전 대통령이 오셨을 때다. 경호원과 함께 오신 그분의 얼굴을 아주 멀리서 콩알만큼 눈에 담았다. 모두의 카메라에 딱 그정도로 찍혔을 것이다.
책 라인업만 보고 가장 내 스타일이었던 출판사는 ‘마음산책‘이다. 그러나 슬픈 건 도서전에서 책을 살펴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한산한 부스도 물론 있지만, 구경해야지 마음 먹고 간 곳은 거의 들어가지도 못했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책이 아니라 부스 구경을 하고 온 느낌… 제작년엔 이슬아 작가님을 뵈러 도서전에 왔었는데, 올해는 와서 보니 작가님이 계셨다. 마침 딱 강연 중이셔서 멀리 바라만 보았다. 최근 나온 신간 <인생을 바꾸는 이메일 쓰기>의 메인 컬러인 파란색 홀터넥 드레스를 입고 오셨다. 이연실 편집자님이 노란 안경을 쓰고 노란 바지를 오신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가성비 인간으로서 도서전이라고 해도 책을 살 마음이 크게 없었지만, 결국 두 권의 책을 사게 됐다. 하나는 문학동네 시인선 <내가 아직 쓰지 않은 것>이다. 그간 문학동네 시집 마지막에 실린 ‘시인의 말’만을 발췌하여 엮은 책이다. 평소에 작가의 말을 읽는 것을 좋아하는 데다 기존 시집 두께의 두 배인데 3,000원밖에 안 하는 다이소적 가성비에 깜짝 놀라서 구매했다. 여러 책갈피와 미니 퍼퓸까지 선물로 받았다. 문동 최고~
다른 하나의 책은 처음 보는 출판사의 책이다. 아크루파이라는 출판사에서 나온 성경 잠언이다. 양장으로 된 표지가 예뻐서 그저 넘겨보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새번역으로 된 잠언을 장/절 구분 없이 모아둔 책이었다. 왠지 동역자같고 그래서… 샀다. 평소에 잠언 읽는 것을 좋아하기도 한다. 고3때 매일 하루에 한장씩 읽었던 기억이 있다.
사고 보니 또 핑크색이다. 스스로 핑크 안 좋아한다고 철썩같이 믿었던 게 어이가 없다. 좋아하는 친구가 일하는 출판사에 커피 몇 잔 넘겨주고 편집자님과 카페에 들렀다. 회사에서 나와서 아직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우울한 시기를 보내고 계신다는 편집자님의 이야기를 들었다. 들을수록 대표님한테 화가 났다. 권고사직의 무게도 모르는 사람…
마지막 보컬 수업을 받으러 사당으로 이동했다. 삼성역에서 사당으로 가는 길이 꽤 붐볐다. 정확히 퇴근 시간이었다. 내가 지금 넣는 회사들도 이 라인인데, 사당으로 출퇴근한다면 내 미래겠구나 싶어서 싱숭생숭했다. 수업을 받는 4개월 동안 거의 매번 일찍 도착했다. 내가 멀리서 오는 걸 알고 계속 양해해주신 선생님… 내가 못하면 나쁜 말은 못하시고 웃으면서 다시 해보자고 하셨는데. 이제 셀프 연습만이 살길이다.
사당으로 가는 동안 교회 연락으로 정신이 없었다. 다음주에 예정되어 있던 사항이 갑자기 취소될 수도 있다는 소식에 살짝 비상이 걸렸다.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 우리 팀원 모두가 이미 준비하고 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교회나 사회나 모든 건 소통의 연속인 것 같다. 같은 상황이라도 누가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아예 달라진다.
이슬아 작가님은 이메일 쓰기로 인생을 바꾸셨다는데, 내 인생을 바꾸는 결정적인 행동은 무엇일까. 더는 책으로 돈을 벌기보다 편식하는 독자가 되고 싶은 지금, 어떤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을까. 매일 이런 고민을 한다. 그래도 내겐 정답이 있는 고민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