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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이 마지막일지 모를

퇴사일기

by 최열음

퇴사 20일차~


실업급여를 못 받게 됐다. 같이 일하던 편집자님이 못받으신다는 소식을 듣고, 고용노동부에 전화해봤는데 고용보험 가입 기간이 충족되지 않았다… 혹시나 했는데 정말! 아쉽긴 하지만 절망까진 아니다. 퇴직금도 있고, 어떻게든 인도하실 거라는 믿음이 있으니. 다만 여행은 취소고 자소서는 더더 부지런히 쓰려고 한다.


요즘도 매일 하나씩 자소서를 낸다. 무슨 로켓발송하듯 쏜다. 기상 시간은 이제 11시를 넘어섰고 ㅋㅋ 취침 시간도 2시를 넘겼다… 1시에 누워도 잠이 안 온다. 오후엔 도서관 컴퓨터를 쓴다. 집앞에 넓고 쾌적하고 자리 많은 도서관이 있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얼마 전엔 고모와 점심을 먹었다. 거의 몇 년 만에 뵙는 것 같은데 퇴사 소식과 예비 결혼 소식을 알렸다. 역시 아빠 동생 아니랄까봐 아빠의 미래를 걱정하시기도 했다. 아빠가 혼자 남지 않게 재혼하기를 바라는 고모의 마음도 이해가 됐다. 모은 돈은 있는지, 어디서 어떻게 살 건지 묻는 고모의 질문에 조심스레 답했다. 왠지 고모를 만나면 조심스러워진다.


아빠가 모르는 이야기를 할까봐, 엄마 없이 자란 티라도 날까봐, 우리 가족이 남들과 달라 보일까봐 무의식 중에 신경 쓰고 있는 나를 본다. 아마 엄마가 아팠을 때 1년간 고모가 우리를 돌봐줘서 더 그런 것 같다. 덕분에 잘 살고 있다고 보여드려야 할 것 같아서?.. 이모들과는 느낌이 다르다. 이모들에게는 불쌍해보이지 않으려고 하게 된다. 엄마 없는 우리를 너무 긍휼히 여기셔서… 아무튼!


고모 이야기를 들으니 아빠가 아빠 같지 않고 객관적으로 보였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한번쯤 멀어보이는 경험도 필요한 것 같다. 고모에게 라떼 한잔을 대접하고 도서관에서 간만에 책을 완독했다. 장류진 작가의 여행 에세이 <우리가 반짝이는 계절>이다. 15년 전 함께 핀란드 교환학생을 했던 친구와 다시 핀란드를 찾는 여행 이야기였다.


작가님 성격도 상황도 마음도 나랑 너무 비슷해서 놀랐다. 그분도 ENFJ시고, 여행의 추억 때문에 항상 그곳을 그리워하시다가 헐거운 계획형다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mbti를 통해 타인을 더 잘 이해하게 되어서 좋다는 이야기에 특히 공감했다. 자주 까먹고 웃고 생각하고 고민하는 부분들이 참 비슷해서 더 좋았다. 여름 휴양으로 핀란드가 참 좋다는 이야기도 새겨 듣기로 했다.


사실 장류진 작가님은 소설가이신데, 15년 전에 처음 핀란드에 갔을 때만 해도 본인이 전업 소설가로 살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한다. 15년이라는 세월의 폭이 이렇게도 크다면 이후의 15년도 어떻게 흘러갈지 예상할 수 없겠다며, 변화무쌍한 삶의 신비를 말씀하셨다. 나는 아직까지는 조금 예측 속에 사는 것 같다. 글을 쓰겠다고 할 줄 알았으니까?


다만 요즘 새삼스럽게 감사하고 신비롭다고 느끼는 것은 결혼이 가까워오다 보니, 얼마 남지 않은 청년부 생활을 다시 보고 있다. 예전에 같이 찬양하는 어떤 분이 “이 조합으로 오늘 이 찬양을 하는 건 마지막일 수도 있으니까“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그게 새삼 다가왔다. 우리 팀원들과 영원히 함께 찬양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당장 로테이션도 매주 바뀌고, 내년이면 팀원들이 또 바뀔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찬양하는 그 자리가, 우리가 드리는

그 시간이 더 소중하게 보인다. 찬양만이 아니라 이 취준의

시기, 글 쓰는 시기, 결혼 준비의 시기, 아빠와의 시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오늘도 도서관에서 돌아오면서 지치기도 하고, 만사가 다 귀찮아서 흐느적거렸지만… 이제 조금은 혼자 있고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다시 돌아오지 않을 이 시간을 충만하게 살아내기 위한 방법은 감사와 성실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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