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을 사야겠다.
가게를 운영한 지 4년 차쯤 되었을 때였다.
온라인으로 어떤 강의를 들었는데 강연자가 이런 말을 했다. "오래된 노포들의 공통점은 주인이 건물주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 말을 듣고 우리는 땅에 대한 갈망이 생겼다. 음식점을 운영하면서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때도 지금도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좋아하는 요리를 오래도록 한 자리에서 묵묵히 즐겁게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월세를 올리겠다는 둥, 이제 내 아들이 들어와 장사를 좀 해야겠다는 둥, 내가 이제는 이 자리에서 국숫집을 하고 싶다는 둥의 소리에 신경 쓸 필요 없는 내 자리를 갖고 싶었다.
사실 신랑과 나는 돈을 쓸 데가 그리 없었다. 둘 다 명품, 외제차, 장신구 등의 사치를 하는 성격이 아니었고 옷을 사도 1년에 한 번 살까 말까 했다. 나는 신랑을 만나기 전부터 가계부를 써왔을 정도로 절약이 몸에 배어 있는 사람이었던지라 현이와 나는 오픈 때부터 돈을 열심히 모았다. 이 돈으로 과연 우리 맘에 드는 자리를 살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우리는 틈만 나면 부동산을 다녔다. 처음 부동산에 들어갈 때는 얼마나 떨리던지. 시금치나 사봤지 땅을 사봤겠는가. 우리는 예상 질문 리스트와 마음속의 가격 상한선을 정해두고 부동산 사장님들을 만났다. 그렇게 이곳저곳 다니다 보니 대략적인 시세가 파악이 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1년 정도 지난 시점, 휴무날 아침 어김없이 서재에 앉아 네이버 부동산을 보고 있었다. 그때 내 눈을 사로잡은 매물이 있었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없던 매물이었다. 그것도 시세보다 훨씬 저렴한데 위치까지 좋은 매물이! 직접 연락을 해보려고 하다가 잠시 주저했다. 그간 부동산을 다니며 어려보인다고 너무 무시를 당해서 혹시 이 매물을 보여주는 부동산도 무시하거나 제대로 된 답변을 안 주면 어떡하지 싶은 걱정이 들었다. 이 매물은 제대로 컨택을 해보고 싶어서 아빠에게 SOS를 요청했다. "아빠, 나 진짜 보고 싶은 매물이 있는데 아빠가 지금 바로 전화 좀 해주면 안 될까?"
모든 것은 이 순간에서 시작되었다.
나는 고등학교부터 자취생활을 했고 해외 생활을 하면서 정말 많은 집을 둘러보고 살아보며 왔는데 집과의 인연이 반복될수록 느끼는 바가 있었다. 집은 서두른다고 내 집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나와 인연이 있는 집이 있다는 것. 땅도 그랬다.
그렇게 통화를 하게 된 부동산 대표는 아빠가 40년 전 직장 생활을 같이 했던 동료였고, 그 대표님은 땅이 우리 것이 되도록 마음을 많이 써주셨다. 알고 보니 대표님이 네이버 부동산에 이 매물을 올리자마자 내가 본 것이었고, 우리의 빠른 컨택과 미팅 후에 바로 매물을 내리셨다. 기존의 땅 주인분은 택시 기사 생활을 오래 한 할아버지 내외셨는데 이제는 부산 집을 정리하고 자식들이 있는 서울로 빨리 가고 싶어 하셨다.
우리는 이 자리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앞 도로는 시원하고 깨끗하게 놓인 일방통행 도로였고, 가게를 하기에 위치가 좋으면서도(지하철역 도보 5분), 주거를 하기에도 적당히 조용했다.(우리는 집과 가게가 하나가 되길 바랐다.) 그런데 겁이 좀 났다. 기존 가게의 월세와 고정비를 감당하면서 토지 매매 대금과 그 이자까지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까. 더군다나 바로 건물을 올릴 수는 없었고, 건설 시점까지는 최소 2년 정도는 자금을 모을 시간이 더 필요했다. 둘이서 계산기를 이래저래 두들겼고 신랑은 당시 상황을 낙관적으로 보았다. 반면 나는 최악의 상황까지 생각을 해보는 성격이라 혹시 중간에 가게 영업이 잘 안 되는 순간이 오면 어떡하나 하는 고민을 했다.
부모님은 자리를 보시고는 꽤나 마음에 들어 하셨고 망설이는 나에게 아빠가 우스갯말로 말했다. "너 안 살 거면 사지 마. 이 땅 좋아 보여서 아빠가 사야겠다." 심각하게 고민하던 나에게 던진 아빠의 한마디에 웃음이 났다. 객관적으로 봐도 이 땅은 위치 및 가격 등의 조건이 너무 좋았고, 1여 년간 땅을 보러 다니면서 한 번도 맘에 콱 와닿은 부지가 없었는데 이 매물은 보자마자 빨리 연락을 해야겠다는 확신이 오지 않았던가. 이번 기회를 놓치면 광안리에 이 정도 조건의 내 자리를 갖는 건 불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고, 이른바 '영끌'이라는 것을 해서라도 이 땅을 사야겠다 마음먹었다.
그렇게 우리는 이 땅을 샀다. 가게를 운영하면서 힘이 들 때마다 이 땅 앞에 와서 둘이서 셀카를 찍으며 씩 웃었다. 괜찮아, 우리한텐 이 땅이 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