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oads May 29. 2023

노인에게 밤은 어둠만인가

편혜영의 < 밤은 지나간다> 리뷰 


권여선과 편혜영, 내가 좋아하는 두 작가의 글을 이렇게 연달아 읽다보니 두 작가의 차이, 개성이 읽힌다. 취약한 자의 고통을 보는 두 작가의  반응은 다르다. 권여선의 글은 힘든 광경을 봤을 때 차마 그 광경에 눈을 못마주치고 안절부절하는 듯하다, 인물의 고단함을 직접적으로 대면하지 못하지만  자신의 고단함으로 스며들어 헉헉대게 한다.  편혜영은 집요하다. 그 광경을 냉정하게 보면서 그 힘듬을 끌어낸다. 편혜영의 소설은 불안의 미로 같다. 이 불안이 끝날 것 같지 않다.  미로를 빠져나온다해도 더 큰 장애가 있다. 어쩌면 미로에서 헤매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익숙한 미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물들은 미로를 못벗어나는 것일까.  


소설집 <밤이 지나간다>에서 '밤'과 '지나간다'는 어떻게 연결되는 것일까? 언뜻 분위기가 떠오르지 않는다. 이 소설집의 제목은 소설집에 수록된 단편들 중 제목이 아니다.  표제작이 아니다. 실린 글들을 전체적으로 상징하는 신호이다. 그런 의미에서 밤이 지나간다는 소설집의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의식일 것이다. 제목을 보고  떠오르는 쉬운 말은 이것이다. '이 또한 지나가리니. ' 밤 또한 지나가리니. 그렇다면 희망인가? 


조현정 평론가는 해설에서,  " 해설의 제목은 '밤과 아침, 그 사이 어디쯤'이다. " '밤이 지나간다.' 이 문장은 명백히 현재형의 문장이다. 자니간다라는 말 안에 이미 과거를 품음으로써 미래를 기대하게 하는 묘한 현재형의 문장이다.--- 우리는 현재형으로 지속되는 밤의 기운과 더불어, 곧 맞이할 아침의 기운까지도 동시에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 밤과 아침 사이 어디쯤에서 나만의 비밀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


조현정 평론가의 말마따나 아침의 기운까지 느낄 수 있을까. 소설에서  그냥 밤이 지나가고, 또 아침이 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끝을 향하는 듯했다. 누구에게 밤은 후회와 불안감을 증폭시킨다. 그리고 그 불안한 번뇌는 어쩌면 그 끝을 보지 못하고  끝날 수 있다. 죽음을 바라보는 노인들 입장에서 아침보다 그 밤이 지나가고 또다른 밤으로 연결될 수 있다. 그럼에도 아침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잠시 아침은 온다. 그 잠시의 아침, 새로운 희망이 아니라. 밤이 멈춘 상태이다. 노인들은 그 미약한 아침에서 안도감을 얻을 수도 있겠지. 어쩌면 조현정 평론가의 말대로 아침의 기운이란 생존감은 고통이 잠시 쉬는 시간이다. 그러면서도 바란다. 이 기운이 영속되길. 영속된다는 것은 아직 가시지 않은 미련일 수도.  


조현정 평론가는 편혜영 소설을 통해서 볼 때 인간이 개별성을 갖는 것은 비밀이라고 했다. "결국 똑같은 운명을 지닌 인간들에게 독특한 개별성을 부여해주는 것은 어쩌면 비밀일 것이다." 그 비밀은 수치심일 수도 있지만 열정일 수 있다. 그렇다면 개별성을 만드는 것이 나에게는 무엇일까?  나의 몸뚱어리의 쓸모와 관련된 것, 내 몸을 던져서 사랑도, 노동도 못했다. 내 몸이 짊어질 그 무엇이 두려웠는지. 내 몸을 내가 원하는 무엇에도 쓰질 않았다. 그런 것이 비밀은 모르겠지만, 내 개별성을 만드는 것일까. 내게 남아있는 비밀은 무엇일까? 죽기 전에 내가 털어놓고 싶은 비밀. 억울한 비밀 말이다. 


소설집에 실린 글들이 너무 일부 심리에 집중되어 있다. 소설이 모든 심리를 이야기해야 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오히려 주제의식에 따라 어떤 심리는 과감히 드러나게 하고, 어떤 것은 과감히 버리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편혜영은 극단적이지만 집중되어 있다.  다만 내가 아쉬워하고 더 극단적이라 보인 소설은 <야행>,<비밀의 호의>이다. 아마 그 인물이 노인이기 때문인 것 같다. 그들의 심리가 충분히 동감하면서도, 그러한 불안 외에 다른 심리도 존재한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은 내 늙어감에서 오는 소리일 것이다. 늙어가는 사람의 외침을 다양한 감정의 소유자로서 인정을 받고 싶었는지 모른다. 죽음만을 기다리는 삶', '이미 죽음에 이른 삶' 로서 노인을 바라보는 것에 대해서 부정하고 싶고, 노인의 다양한 인간성에 대하여 인정받고 싶다. 노년에게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도 허황되지만, 허무만을 이야기하는 것도 부족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레가토가 끊어지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