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 가득한 여행
어제 미사의 독서와 복음은 가난한 과부의 봉헌에 관해 이야기한다. 엘리야 예언자에게 과부가 바치는 생의 마지막 식사가 될 수 있는 빵, 마르코 복음이 전하는 가난한 과부의 봉헌금이다. 신부는 강론에서 가난한 자가 가난하다고 말하는 것은 용기라고 말했다. 글쎄 잘 모르겠다. 요즘 사람들은 있어도 모두 ‘없다, 없다’ 하며 엄살을 부리니 용기라는 말이 적합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용기라는 말이 나에게 네팔 걸인들을 떠올리게 했다. 그들은 가난하다, 병들었다, 장애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여행객에 처참한 모습으로 구걸을 한다. 그런데 그 태도가 용기가 아닐까. 난 그들과 마주칠 때 불편했는데, 그럴 필요가 있을까. 그들은 용기를 내어 손을 내민다. 그들이라고 수치심이 없겠는가. 그런데 생존을 위해서 그들의 상처를 내민다. 그건 엄살이 아니다.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용기이고, 살아보겠다는 의지이다.
내가 그들을 보면서 죄책감을 가지고, 불편해 할 이유가 있을까. 그들의 용기에 조금 힘을 보태고, 나도 이렇게 용기 있게 살아가자고 하면 되지 않을까. 더 나아가 트레킹을 시작하는 나의 용기를 응원해달라고 하면 되질 않았을까. 그렇게 서로의 용기를 복돋우는 작은 손길, 눈길이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래, 이번 여행은 나에게 용기였다. 항상 가성비를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하는 나에게 부담스러운 수준의 여행경비를 부담한 것도 용기였다. 큰 것을 바라지 않고, 잠시나마 마음상태에 집중해서 떠난 것도 용기다. 내 체력으로 해발 4000미터를 올라간다는 것이 무리일 수 있었다. 그런데 해냈다. 그 과정은 본래 여행 목적처럼 내 무거운 몸에 집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정이었다. 이번 코스, 오늘의 여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어서 다행인 일주일을 보냈다. 만족스럽다.
하루키가 말한 것처럼 여행은 많은 피곤과 작은 환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여행 후 다행히 얻어지는 것이 있다면 작은 환상이다. 그도 시간이 흐르면 사라진다. 그렇다면 나에게 작은 환상은 무엇일까. 욕심을 내어 다른 질문을 해본다. 여행이 나에게 무엇을 남겼는가. 일주일 시간을 비우고 지냈으나 다시 돌아온 생활에서 난 그대로이지 않은가.
히말라야를 어떤 어휘로 표현하면 적당할까. 어떤 어휘가 먼저 와야 할까. 평화로움, 황량함, 외로움, 무덤덤함으로 가득한 곳이었다. 히말라야 트레킹에서 나는 많은 생명을 만났다. 마을, 사람, 동물, 식물 그리고 바람 모두가 찰나의 순간이지만 어떤 울림을 전하는 숭고함이 있었다. 육체적 정신적 고통 속에서, 산에서 만나기 때문에 주는 환상일 수 있다.
협곡을 따라 구불구불 오르는 좁은 길을 걷다가 마주치는 생명들은 그 자체로 내게 말한다. 호들갑을 떨 만큼 행복하지도, 슬프지도 않다. 그저 거친 바람과 따가운 햇볕에 얼굴이 붉게 검게 구을 듯 조금씩 변화하며 살아지는 것이라고. 아마도 잊어질 수 있겠지. 그러나 분명 나에게 보낸 울림이 잊어지는지, 다시 살아나는지는 여행 후 나에게 달려있다.
티베트 불교의 상징인 제삼의 눈이 그려진 스투파 그리고 마니차, 마니석, 휘날리는 오색의 깃발, 룽타가 보고 싶다. 무덤덤하게 살아가는 것이 삶의 진정한 용기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