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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알드 별 May 23. 2024

개발자는 영어 못해도 된대, 정말일까?

진실 혹은 거짓

“그래도 개발자는 기술직이잖아, 영어 못해도 된대! 개발만 잘하면 되지~“

의례 하는 이야기들. 이민을 하고 직업을 구하면서 심적으로 도움이 많이 되었던 말이다. 그래, 개발자인 게 감사하지. 개발자는 영어 못해도 되잖아. 대학 졸업 후에도 쭉 영어 공부를 이어 왔고 캐나다에 두어 달 지내면서 영어에 더욱 익숙해져 당시 영어는 나에게 큰 고민은 아니었다.




그래서, 진짜냐고 물어본다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확실히 다른 직업군에 비해서 유창한 영어가 필수는 아니다. 못해도 일을 할 수는 있다는 거지, 일을 '잘'할 수 있다는 건 아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일을 하는데 어찌 언어가 빠질 수 있으랴?


입사 첫날, 하루종일 인사팀에서 준비한 오리엔테이션을 참석하게 되었다. 첫 세션이 끝나고 나는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솔직히 첫 한 달은 제법 눈물도 흘렸다. 나 자신이 답답하고 바보 같아서. 그리고 어디 도망칠 곳 없이 결국은 내가 헤쳐나가야 하는 것들이라서.

문제는 리스닝이었다. 원래도 리스닝이 약한 편이긴 하지만 이건 안 들려도 너무 안 들린다. 영어 교육에서 듣던 또박또박한 발음과 적절한 속도의 대화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동안 나와 대화했던 이들은 나에게 배려를 하고 있었다. 내가 잘 못 알아들을 것 같으면 조금 천천히, 또박또박 얘기해 주었던게지.

캐나다와 미국은 다양한 이민자들이 있고 각자의 배경에 따라 발음과 억양이 다르다. 또 우리가 한국어로 대화할 때를 상기해 보면 그렇듯 실제 대화에서는 일정한 속도로 말을 하지 않는다. 빨랐다가 한 템포 쉬었다가 다시 속사포. 그 속도 또한 개인마다 다르다. 그리고 듣기만 하나? 입사 초반에는 어김없이 자기소개를 시키고 스몰톡을 하며 심지어 아이스브레이킹으로 게임도 한다. 게임도 처음 해보는 거라 익숙지 않다. 얼굴은 웃고 있지만 마음속에선 SOS를 외치고 손에는 땀이 나고 난리가 났다.


더욱 난감할 때는 농담을 던질 때인데, 이해하지 못하면서 분위기상 웃는 게 8할이다. 농담했는데 이해 못 해서 질문을 하면 농담한 사람은 얼마나 무안하겠는가? 농담은 문화와 직결되어 주류가 되는 미디어, 역사, 맥락을 알아야 이해할 수 있다. 한국에서 일할 때에는 종종 농담도 던지던 위트 있던 나였지만 그런 나는 캐나다에선 존재하지 않는다. 필요할 때만 간결하게 입을 여는 과묵한 아시안, 슬프지만 그게 나다. 힝.


개발자가 영어를 잘 못해도 되는 이유는, 대체할 수단이 있고 직업 특성상 기본적으로 영어 노출이 많기 때문이다.


1. 개발 용어는 이미 영어로 된 게 많다. 따라서 발음과 억양만 숙지하면 명사나 형용사로 된 기술 표현은 쉽게 적응할 수 있다. 문제는 동사다. 여기에 관용적으로 쓰는 숙어까지 들어가면, 현장에서 부딪히며 공부가 필요하다.

2. 개발자의 언어, 코드이다. 이만큼 확실하고 편한 방법이 없다. 개발하고 서로 리뷰를 하다 보면 그래도 할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제일 행복한 순간이다.

3. 문서. 요즘은 번역 툴도 잘되어 있고 Chat GPT의 도움을 받으면 잘 짜인 영어 문서 만드는 건 일도 아니다. 영어 대화에 순발력과 융통성이 필요하다면 문서나 메신저는 이민자에게 좋은 도구가 된다. 천천히 정제해 생각을 피력할 수 있고 상대의 이야기도 여러 번 읽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일을 시작하고 지금까지도 회의가 제일 부담된다. 정확한 이해와 판단이 필요한 만큼, 남들이 하는 이야기를 오류 없이 잘 이해해야 하고, 나의 의견을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각자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나누는 것이 큰 가치인 만큼 발언권도 공평하게 주는 편이라, 어쨌든 말은 해야 한다. 회의를 할 때에는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회의가 끝나면 불안할 때도 많았다.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게 맞는지, 어디 놓친 부분은 없는지 재차 자문하곤 했다. 한국이었으면 다른 급한 일과 병행하면서 한 귀로 흘려 들어도 충분히 이해했을 텐데 매 순간 온몸의 세포를 곤두세워야 회의 하나를 끝낼 수 있다는 게 서글프다. 에너지를 굉장히 쏟는 일이라, 회의가 많은 날은 무조건 꿀잠 예약인 건 덤이다.


또, 경력이 있어 Senior가 되면 회의도 그만큼 많아지고, 때로는 다른 사람을 논리로 설명하고 설득해야 한다. 갑론을박의 상황도 종종 있다. 서투른 영어로 이것을 해내려면 알맹이가 꽉 차 있어야 한다. 즉, 어물쩍 입을 털어 상황을 모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얘기. 어쨌든 전문성을 가지려면 기술과 지식이 있어야 하고 그걸 표현할 언어가 되어야 한다. 이건 한국어든 영어든 마찬가지다.


당시 자존심과 자부심이 강했던 나는 갑자기 언어가 나의 큰 약점이 된 것 같아 서글프고 힘들었다. 다른 이가 한 말을 잘 못 알아들어서 여러 번 다시 물은 적도 많지만 내가 말을 했을 때 상대가 못 알아들을 때도 있었다. 그때는 잘 말하다가도 뇌가 정지한 것처럼 당황하곤 했다. 생각해 보면 한국에서 한국말로 일할 때에도 그런 상황이 있었고 서로 자연스럽게 되묻고 더 쉽게 얘기하면 되는데 그게 왜 어려웠을까. 나의 약점을 들키는 것 같고 내가 이 일과 자리에 맞지 않는 사람 같아 자신감이 줄어들고 주눅이 들어 힘들었다. 당시 끊임없이 한국에서의 나와 캐나다에서의 나를 비교했는데, 캐나다에 괜히 왔나 싶으면서도 이 걸 넘으면 나 진짜 한층 더 큰 사람이 되겠다 싶었다. 지금도 여기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많이 이겨내고 있는 중이다.


비즈니스 영어는 개발자에게도 큰 산이다. 모든 언어 공부가 그렇듯 정도도 없고 지름길도 없다. 이민 30년 차에게도 영어는 영원한 숙제라고 한다. 이제 이민 4년 차인 나는 오늘도 중요한 회의를 참석하면서 녹화를 부탁했고, 저녁에 녹화본을 보며 다시 한번 복습할 예정이다. 이렇게 쌓인 하루하루로 언젠가는 조금 더 언어에 자유로운 시간이 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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