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간 정든 나의 첫 직장을 떠나며
"엄마, 나 합격했어!"
"진짜야? 축하해, 우리 딸. 엄만 될 거 같았어!!"
2012년, 나는 S그룹 공채에 최종 합격했다. 아무 준비 없이 한차례 도전했다가 고배를 마시고 심기일전하여 도전한 두 번째 기회였다. 만 23살, 어린 나이에 어른들이 좋아하는 대기업에 붙으니 나는 그야말로 부모님의 자랑이었다. S그룹에서도 복지가 좋고 여성에 대한 대우가 좋은 계열사라 결혼하고 육아하면서도 쭉 다닐 수 있는, 그야말로 평생직장을 얻었다고 생각했다.
재직한 지 7년이 조금 넘은 무렵, 나는 자진 퇴사했다. 동료도 근무 환경도, 연봉도 모두 만족하던 곳이라 퇴사하는 그날까지 못내 미련이 남았더랬다. 재직하는 내내 많은 기회가 있어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고 업무에 대해서도 꽤나 인정받았다. 6개월만 더 근무하면 과장으로 승진할 수도 있는 시점이었다. 이직 한 번 생각해보지 않았고 할 수만 있다면 평생 다니고 싶었다. 내 소식을 접한 사람들은 어쩔 땐 나보다 더 아쉬워했다. 혹자는 그 직장, 나한테 넘기면 안 되냐고 농담까지 건네곤 했다. 나 또한 넘길 수 있다면 넘겨주고 싶을 만큼 애정하던 곳이었다.
하지만 나는 결혼을 했고, 내 남편은 남자친구일 때부터 캐나다에서 살고 있었다. 내가 그와 결혼을 결심한 순간, 나는 캐나다로 이민도 함께 결심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실제로 한국 생활을 정리하고 캐나다로 넘어간 것은 남편이 캐나다로 간지 4년 뒤, 우리가 결혼식을 올린 지 1년 뒤였으니 나는 사실 오랫동안 마음의 준비를 한 셈이다.
나는 해외 생활에 대한 막연한 계획이 있었다. 이 문장에 어쩌면 로망이라는 단어가 더 잘 어울릴지 모르나, 나는 계획이라 쓰고 싶다. 로망이라기에는 어느 정도 현실성이 묻어 있고, 해왔던 나름의 준비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와 나이차이가 꽤 나는 친언니는 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해외생활을 하는 중이었다. 언니는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다 돌연 중퇴를 하고 다른 나라로 유학을 떠나며 정착했다. 금전적으로 여유롭지 않은 유학길에, 환율까지 안 좋아지며 많은 고생을 했던 언니. 그런 생활을 간접적으로 경험한 나는 해외생활에 로망 따윈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외생활에 뜻이 있던 것은 여러 이유가 있었는데, 몇 가지를 나열해 보자면 이렇다.
- 한 번 사는 인생, 한국에서만 살고 싶진 않았다!
- 직업상, 해외에 나가면 대우가 더 좋고 혹 몇 년 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도 경력에 장점이 될 수 있다.
- 결혼하고 아이가 있다면 아이의 교육적인 면에서도 좋다.
고등학생 때 친구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호주에 가서 살자는 이야기를 했었다. 사춘기 소녀의 도망가고 싶은 치기였을 테지만 그 이후에도 쭉 해외생활에 대해 생각을 놓지 않았다. 다만, 언젠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아이가 초 저학년일 때 기술이민을 하면 되겠다 싶었다. 그런데, 인생 한 치 앞을 모른다고 기회가 더 빨리 찾아온 것이다. 내가 바라던 시점은 아니었으나 기꺼운 마음으로 결심을 할 수 있었다.
안정적이고 탄탄한, 나의 20대를 바친 직장을 그만두고 30대에 백수로서 타국에서 새로운 인생을 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또한 큰 바람 없이 잔잔하게, 그야말로 무난하게 살아온 나의 인생에서 가장 큰 변곡점이 될 것이라는 건 자명했다. 나는 조용했던 내 삶에 새로운 잉크 한 방울을 과감히 떨어뜨려보기로 했다.
그날, 포맷한 노트북과 함께 목에 걸었던 사원증을 반납하고 건물을 나오며 나는 복합적인 감정에 휩싸였다. 말로 표현하기 어렵지만 아쉬운 마음과 함께 약간의 해방감, 그리고 설렘과 긴장이었던 것 같다.
모두 안녕,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