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 일영
옷을 좋아하는 것과 옷을 까다롭게 고르는 건 다른 문제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옷을 만져보고 입어보고 돈을 지불해서 옷장에 보관하는 그 모든 여정을 좋아하지만 옷을 고를 때 주관이 강하지는 않다. 그래서 가진 옷에도 일관성이 없다. 레터링이나 패턴이 들어가 있는 옷을 주로 골랐다가도 당장이라도 회사에 가야 될 것처럼 단정한 옷을 잔뜩 사기도 한다. 달리 생각해보면 옷을 입는 목적이 다른 것일지도 모른다. 다양한 옷으로 이미지를 매일 바꾸고 싶은 나 같은 사람이 있는 한편, 고집스런 취향으로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야 마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인터뷰이 ‘배비’는 옷에 관해서라면 누구에게도 무엇도 양보하지 않는 사람이다. 양보가 삶의 미덕이라고는 하지만, 본인의 취향에 양보가 없는 건 타인에게 피해를 주기는커녕 귀한 볼거리가 되니 얼마나 무해한 일인가. 이 인터뷰를 통해 나처럼 옷의 회색지대에 있는 사람들과, 흑백의 영역에 있는 사람들이 살짝 더 가까워지기를 바란다.
안녕하세요, 배비님. 인터뷰에 참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독자 분들께 간단하게 인사 부탁드려요.
안녕하세요, 옷을 좋아하는 배비입니다.
좋아하는 옷 취향에 대해 간단하게 소개 부탁드려요.
활동성 있는 옷보다는 격식 있는 옷을 좋아해요. 그래서 집에 트레이닝복이나 맨투맨은 거의 없고, 셔츠가 많아요. 격식 있는 옷은 항상 옷의 뿌리가 있거든요. 요즘은 근본이라고 하죠. 근본 있는 브랜드를 찾는 것도 좋아하고, 옷에 얽힌 이야기를 특히 좋아해요. 제품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떤 생각으로 디자인되었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제 구매 욕구를 자극하는 것 같아요.
미니멀 룩, 캐주얼 룩, 클래식 룩 이렇게 스타일에 네이밍을 하잖아요. 저는 이걸 별로 안 좋아해요. 룩이라고 하면 꼭 이렇게만 입어야 된다는 느낌이 있거든요. ‘이 옷에는 이 신발을 신어야 돼’가 정해져 있는데, 그걸 벗어나면 훨씬 다양하게 입어볼 수 있어요. 용어 안에 갇혀 다양한 옷을 못 입어보면 슬플 것 같아요.
근본 있는 브랜드라는 말이 흥미로운데요. 배비님이 ‘근본 있다’고 판단하시는 기준이 있을까요? 예시를 말씀해주셔도 괜찮습니다.
바버를 먼저 예로 들어보고 싶네요. 바버는 100년이 넘은 영국 브랜드예요. 옛날 옷은 소재가 좋지 못해서 비가 올 때 방수가 안 됐잖아요. 영국이라면 특히 날씨가 오락가락하고 우중충했겠죠. 그래서 면 위에 왁스를 바르기 시작했어요. 지금은 소재가 많이 발전했는데도 바버 옷에는 아직도 왁스가 발려서 나와요. 그런 게 고집과 근본이라고 생각해요.
뉴발란스 992도 마찬가지예요. 그 모델이 1900년대에 발매됐다가 스티브 잡스가 신어서 붐이 일어나면서 2006년도에 재발매된 모델인데요. 992를 만든 과정을 보면 정말 많은 가죽을 가지고 손으로 직접 만들어서 개체 차이가 심해요. 하지만 최소 몇 시간의 공정을 거쳐야 한다는 등 엄격한 기준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신발이기 때문에 개체 차이가 나도 이해할 수 있고, 지금은 프리미엄이 붙어서 리셀 가격이 40만 원을 능가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는 거죠.
시대에 맞춰 변하지 않고, 불편함이 있어도 옛것을 고수하려는 경향이 고집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렇죠.
그런 취향의 매력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본인에게나 타인에게 있어서요.
제 신체와 관련이 있어요. 저는 보통의 키보다는 작은 키에 속하거든요. 제가 사는 옷들을 보면 대부분 180cm가 넘는 모델들이 입고 있지만 큰 두려움 없이 사요. 키가 큰 사람들이 입는 옷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제가 입었을 때는 ‘저걸 저렇게 입어도 괜찮네?’, ‘옷이 클 텐데 커도 멋있네?’ 하면서 전혀 다른 느낌을 줄 수 있거든요. 그리고 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귀여워지는 면이 있어요. 그것도 저만이 낼 수 있는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네요. 어떻다고 들어본 적이 없어서요. 그래도 비슷하게 ‘저 옷이 저런 느낌으로 맞을 수 있구나’ 이런 생각을 하시지 않을까요?
제가 타인의 입장에서 말씀드리자면, 바버라는 브랜드의 옷이 배비님의 시그니처 같은 옷이잖아요. 길에서 배비님이 말씀하신 모델들처럼 어깨도 넓고 키도 큰 남성 분들이 그 옷을 입은 걸 봤는데 이상하게 옷이 안 예뻐보이더라고요.
남성성이 강한 사람들이 입는 옷이 사실은 맞는데, 제가 입으면 다른 느낌이죠. 제 취향의 매력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의외성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서두에 배비님 같은 분은 고집스런 취향으로 원하는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는 섣부른 추측을 해보았는데요, 제 생각이 맞았는지 궁금합니다.
그렇죠. 체구가 작다 보니 저를 귀엽게만 보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게 안 느껴지게 하고 싶어서 더 격식 있고, 단정하고 차분한 느낌을 주려고 하는 것 같아요. 쉬운 사람이 아니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요. 옷과 신체는 서로 떠날 수 없는 관계니까요.
배비님의 취향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건 무엇일까요? 예를 들면 깐깐한 성격이 한몫했다던지, 어릴 때부터 그런 옷들을 많이 접했다던지요.
어릴 때 보통의 엄마들이 주는, 여자 아이라면 당연하게 입어야 하는 옷이 싫어서 반항을 많이 했어요. 그것도 성격의 일부일 수 있겠죠. 내 주관대로 해야 되는 게 있어요. 제가 예쁘다고 생각한 옷이 있으면 그걸 꼭 입어야 돼요. 다른 사람이 이것도 예쁘다, 저것도 예쁘다 추천해도 ‘별론데?’ 이런 생각이 들어요. 요즘은 하프집업 가디건이 유행하는데, 저는 라운드넥이 사고 싶은 거예요. 그럼 그냥 라운드넥을 사 버려요.
옷을 우유부단하게 고르는 제 입장에서는 대단한 자신감을 필요로 하는 일 같은데요. 패션감각은 타고난 면이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무래도 그런 면이 있죠. 그래도 옷을 엄청 많이 보고 또 세세하게 살펴보는 것 같아요. 평소에 옷에 대한 유입이 많으니까 스스로 대입도 많이 해 보고 ‘난 저런 스타일은 안 어울릴 것 같은데?’ 이런 상상을 많이 해 봐요.
옷을 찾아볼 때는 유튜브를 많이 봐요. 거기에서 몇 가지를 골라서 더 깊게 찾아보는 것 같아요. 블로그도 찾아보고, 공식 홈페이지도 보고요. 사실 유튜버들도 스타일이나 체형이 다 다르거든요. 일단 저는 10대, 20대를 타겟하는 유튜버는 잘 안 보고, 광고받은 것도 넘겨요. 그 사람이 지속적으로 언급하는 브랜드를 중심으로 찾아보는 편이에요.
중성적인 스타일이라는 말도 많이 들어보셨을 것 같아요. 저는 개인적으로 중성성이 그 사람에 대해 궁금해지는 느낌을 주어서 좋아하는데요. 배비님은 어떻게 느끼시나요?
옷으로까지 성별을 드러내야 할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항상 여자, 남자를 구분하는 굴레 속에 살잖아요. 동시에 은근한 관심도 받고 싶은 거죠. ‘쟤 좀 신기한데?’ 이런 거요. 특이하다는 말을 싫어하면서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옷을 입을 때 매치가 고민될 때가 많아요. 길을 걷다가 배비님처럼 아귀가 맞는 스타일을 하고 계신 분들을 보면 ‘저렇게 입고 싶다’고 종종 생각하는데요. 옷을 매치하는 데 팁이 있으신가요?
‘오늘은 꼭 이걸 입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거기서부터 뻗어 나가요. 하나를 정해 두면 따라오는 게 많거든요. 오늘 만약에 올블랙을 하고 싶으면 매치가 쉬워지는 거죠. 아니면 ‘요즘은 이런 스타일을 많이 입었으니까 아예 반대로 가볼까?’하는 생각도 해요. 또 평소에 옷을 많이 보다 보니 알게 모르게 옷 조합에 대한 힌트도 얻는 것 같아요.
좋아하는 색 조합이나 옷 조합이 있을까요?
톤온톤을 굉장히 좋아해요. 그중에서도 무채색 계열의 톤온톤이 좋아요. 하늘색과 네이비, 거기에 베이지 조합도 좋고요. 바버 자켓에 넥타이에 치노팬츠나 슬랙스도 좋네요.
패션이 옷에 국한된 것만은 아닌 것 같아요. 라이프스타일이나 언행과도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면에서 배비님이 본인의 패션을 지키는 방법이 있으신가요?
원래 말이 적고 쓸데없는 말을 잘 하지 않아요. 그런 목적으로 옷을 입는 건 아니지만 성격과 옷 스타일이 잘 맞아 들어간 것 같네요. 또 저의 사생활을 잘 공개하지 않고, SNS에서도 팔로워들에게 말을 걸거나 하지는 않아요. 대신 제가 좋아하는 색감들로 조용히 피드를 꾸미죠.
식상한 질문을 하나 드리려고 해요. 배비님에게 옷이란?
음… 긴 말 없이 나를 표현해주는 수단인 것 같아요. 자기소개를 할 때는 “저는 이런 걸 좋아하는 사람입니다”를 말로 하지만, 옷으로도 충분히 소개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동안 살아왔던 것이나 앞으로 지향하는 관점이 다 들어가 있으니까요. 특히 과거를 보여준다고 생각해요.
아직 본인의 옷 취향을 찾지 못하신 독자 분들께 전하고 싶은 말이 있으신가요?
이것저것 많이 보고 입어보고 실패도 해야 취향이 생기는 것 같아요. 남의 걸 무작정 따라하는 게 아니라 나를 대입시켜보는 것. 저도 많이 실패했거든요. 어떻게 한 번에 잘 입겠어요?
저희 잡지에는 마지막 공통 질문이 있습니다. 배비님이 따라하고 싶은 취향을 말씀해 주세요. 다음 호에 반영될지도 모릅니다.
술과 커피가 생각나네요. 그런 데에 확고한 취향이 있는 사람들. 또 모든 걸 기록하는 습관을 가진 사람들이요.
성실하게 답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옷에 대한 질문들을 예상하셨을 수도 있는데, 사람에 관한 질문을 더 많이 해서 실망하시진 않았을까 걱정이네요. 배비님이 어떤 옷을 좋아하시는지보다, 그런 취향을 가지게 된 연유나 개인적인 감상이 궁금했거든요. 옷 취향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나니 배비님의 패션 여정을 더 응원하고 싶어집니다. 틀에 갇히지 않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아 나가는 배비님 같은 분들이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모든 사진 출처: 배비씨 인스타그램 (김배비(@baebeeeii) • Instagram 사진 및 동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