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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버스앤러버스 Jun 22. 2022

2023 예상 트렌드, 전통주 제대로 맛보기

에디터 일영

  몇 년치의 트렌드를 발빠르게 예측하는 트렌드 분석가들이 있다. 이들은 온 세상에 퍼져 있는  트렌드의 미미한 신호들을 묶어 쓸모있는 정보로 만든다. 잘은 몰라도 전문가들이 모여 내놓는 결론이니 그 분석은 어느 정도 타당할 것이다. 반면 방구석 트렌드 관심자인 내가 감지할 수 있는 신호는 나의 직관 뿐이다. 좋고 싫음, 부러움, 시기, 존경 같은 것들로 이루어져 있는 나의 직관 중 <로버스앤러버스>에서는 주로 부러움을 뽑아낸다. 나의 부러움 레이더로 보았을 때 빠르면 2022, 늦으면 2023의 넥스트 트렌드는 전통주다. 내가 전통주를 잘 마시는 사람들이 부러워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름의 근거를 덧붙이자면 이렇다. MZ세대라 불리는 20대에게는 땅따먹기 심리가 있다. 추억의 플래시 게임 땅따먹기에서 땅은 구슬의 영역을 점점 좁혀오고 구슬은 그 안에서 네 모서리를 왔다갔다 하며 분투한다. 취향의 영역도 마찬가지다. 대중적인 취향이 좁혀올수록 남들과 차별화되는 취향을 갖고 싶은 심리는 커진다. 주류의 세계에서 보았을 때 소주, 맥주, 와인 순으로 대중화가 이루어졌고 남은 주종 중 가장 접근성이 높은 것이 바로 전통주다. 그렇기 때문에 취향 구슬은 바로 이 전통주라는 영역으로 도망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앞서가는 트렌드 관심자라면 전통주가 딱딱한 땅으로 대중화되기 전 말랑말랑 땅 상태일 때 발을 들일 수 있어야 한다. 지금은 내 부러움을 과대해석한 것처럼 보이지만, 언젠가 이 글이 전통주 시대의 서막을 여는 글이 되기를 바란다.



전통주야 오해해서 미안해


  전통주에 대한 나의 식견은 매우 짧다. 유일한 지식이라고는 언젠가 맥주 만들기 클래스를 갔을 때 막걸리, 청주, 탁주, 동동주가 각각 다른 맑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들어본 정도다. 그러다 보니 자연원료로 만들면 아무데나 ‘오가닉’, ‘내추럴’을 붙이는 것처럼, 한국에서 제조된 술이면 다 뭉뚱그려 전통주라고 부르는 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전통주의 기준은 법률에 명시되어 있었다. ‘전통주 등의 산업진흥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지정된 문화재 보유자나 명인이 면허를 받아 제조하거나 특정 지역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주원료로 한 경우에만 전통주가 될 수 있었다. 이렇게 나의 ‘아무데나 전통주’ 발언은 곧바로 폐기되었다.

- 전통주 등의 산업진흥에 관한 법률 -
2. "전통주"란 다음 각 목에 해당하는 술을 말한다.
가. 「무형문화재 보전 및 진흥에 관한 법률」에 따라 지정된 주류부문의 국가무형문화재와 시·도무형문화재의 보유자가 「주세법」 제6조에 따라 면허를 받아 제조한 술
나. 「식품산업진흥법」에 따라 지정된 주류부문의 대한민국식품명인이 「주세법」 제6조에 따라 면허를 받아 제조한 술
다. 「농업·농촌 및 식품산업 기본법」 제3조에 따른 농업경영체 및 생산자단체와 「수산업·어촌 발전 기본법」 제3조에 따른 어업경영체 및 생산자단체가 직접 생산하거나 제조장 소재지 관할 특별자치시·특별자치도·시·군·구(자치구를 말한다. 이하 같다) 및 그 인접 특별자치시·시·군·구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주원료로 제조한 술로서 제8조에 따라 특별시장·광역시장·특별자치시장·도지사·특별자치도지사(이하 "시·도지사"라 한다)의 제조면허 추천을 받아 「주세법」 제6조에 따라 면허를 받아 제조한 술(이하 "지역특산주"라 한다)


  또다른 장벽은 맛에 대한 편견이었다. 발효주 이외의 전통주를 맛 본 경험이 거의 없다 보니, 막걸리 계열의 주류에서 나는 특유의 시큼텁텁한 맛이 전통주를 관통하는 맛일 거라고 짐작했다. 거기에 할머니댁의 옷장, 오래된 나무의 꿉꿉한 냄새 같은 K-전통의 정서가 합쳐져 내 머릿속에서는 ‘전통스러운 맛’이라는 강렬한 이미지가 형성되었다. 그래서 누군가 맛 좋은 전통주를 먹고 왔다고 하면 자연스레 그 전통스러운 맛이 떠올라 그다지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나중에 더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새로운 전통주들을 맛본 후 이 편견은 완전히 공중분해 되었다.

  어쨌거나 전통주에 대한 나의 감상은 이렇게 배배 꼬여 있었다. 하지만 이제 결심했다. 2023 트렌드의 후보인 만큼 미리 현장조사를 해보고 줏대 있게 판단해야 한다. 선선한 5월의 저녁 날, 전통주의 진수를 맛보러 떠났다.



한국적인 맡김차림, 근데 이제 전통주를 곁들인

  전통주 좀 먹어 본 지인의 추천을 받아 서울 합정에 위치한 ‘지리’를 방문했다. ‘지리’는 지리산 식재료로 만든 맡김차림(오마카세)과 전통주를 함께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다양한 안주와 술을 함께 먹어보며 조합을 판단해보기 좋은 곳이라고 생각해 방문을 결정했다. 주류는 막걸리와 기타 전통주로 구분되어 있었고, 술을 잘 모르더라도 아래에 적힌 간단한 설명을 보며 취향껏 고를 수 있었다. 에디터 먼지는 요즘 핫하다는 한산소곡주를 추천했으나 도수도 가격도 높은 관계로 또 다른 유명한 술인 고흥유자주를 골랐다.


고흥유자주

  귀여운 잔과 함께 서빙된 고흥유자주는 깔끔한 유자차의 느낌이었다. 유자차를 마실 때 과일청의 강한 단맛을 싫어했다면 먹어볼 만 하다. 유자가 술을 만나니 뒷맛이 술의 쌉쌀한 맛으로 상쇄되어 부담이 없었고, 탄산기 없이 맑은 편이어서 호로록 마시기도 좋았다. 라벨을 살펴보니 고흥유자주는 약주에 속한다고 표기되어 있었다. 약주는 쌀이나 감자, 고구마 등으로 만든 누룩 1% 이상을 사용한 술이다. 발효주는 걸쭉한 술일 거라는 편견 때문에 당연히 고흥유자주도 증류주에 속할 줄 알았는데, 발효기법이 사용된 맑은 술이었던 것이다.


  이날의 맡김차림은 봄 쑥국으로 시작해 죽순 금귤 샐러드, 두릅 더덕전, 버크셔K 안심 육전, 지리산 산딸기, 버크셔K 삼겹 고추장찌개, 홍삼 캬라멜과 인절미 마카롱으로 이어졌다. 유자라는 특수한 재료가 들어가다 보니 음식마다 조화로운 정도가 달랐다. 술과 음식의 궁합을 썩 예리하게 판별하는 편은 아니지만, 내 입맛에는 상큼한 죽순 금귤 샐러드와 가장 잘 어우러졌다. 샐러드에 당귀, 돌나물 같은 쓴 맛이 있는 채소가 있어 단 술과 함께하기 좋았던 것 같다. 반대로 유자 자체에 당분이 있다보니 단맛이 강한 고추장찌개와는 부딪치는 느낌이었다. 고흥유자주를 드시게 된다면 쌉쌀한 채소가 들어 있는 샐러드와 함께하시는 것을 추천한다.



막걸리에 대한 편견 깨기

  나의 다음 미션은 막걸리에 대한 오랜 편견을 깨는 것이었다. 내가 그동안 막걸리를 꺼렸던 이유는 명확했다. 막걸리의 가장 큰 특징이 걸쭉함과 탄산감인데, 이 두 가지 모두가 나에게는 부담이었다. 맥주는 탄산이 있지만 걸쭉하지 않아 청량하고, 와인은 둘 다 없으니 계속 막걸리 이외의 선택지를 골랐던 것이다. 그런 나에게 이 체험 여정을 함께한 친구가 탄산이 약한 막걸리를 소개했다.


일곱쌀 막걸리

  일곱쌀 막걸리를 맛보기 위해 판매처 중 하나인 ‘갈현차돌’에 방문했다. 일곱쌀 막걸리는 ‘쉽고 재미있는 술’을 지향하는 한아양조의 제품으로 라벨에 개구진 아이의 모습이 담겨 있다. 이 아이가 사실 한아양조 대표의 어릴 적 모습인데, 일곱쌀(7도)-아홉쌀(9도)-열두쌀(12도)로 갈수록 아이가 술에 취한 것 마냥 점점 뒤로 넘어간다. 나이가 올라갈수록 탄산감이 강해지고 더 응축된 맛이 느껴진다고 한다. 우리의 목적은 단 하나, 탄산이 약한 막걸리였기 때문에 고민 없이 일곱쌀 막걸리를 주문했다. 술을 먼저 맛보니 약한 탄산감과 부드러운 쌀맛이 느껴졌다. 시큼한 맛이 없지는 않지만 약한 편이어서 크게 거슬리지 않았다. 이번에 곁들일 음식은 차돌박이다.

  고운 빛깔의 차돌과 막걸리는 예상보다 훨씬 잘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차돌의 고소함과 막걸리의 고소함이 기가 막히게 어우러졌고, 차돌에 특별히 간이나 양념이 되어있지 않다 보니 막걸리의 다채로운 맛을 해치지 않았다. 하지만 이날 차돌을 먹고 막걸리의 치명적인 단점 한 가지를 깨달았다. 배가 정말 빨리 부르다는 것이다. 술보다 음식에 욕심이 많은 나에게 쌀로 만든 막걸리는 항상 음식을 적게 먹을 수밖에 없는 아쉬움을 남긴다. 결국 이날도 배불러서 더 못먹겠다며 배를 통통 두드리고 나왔다.


느린마을 막걸리

  마지막 방문지는 느린마을 양조장이다. 막걸리의 끝판왕을 제대로 먹어보기 위해 대표 브랜드를 찾았다. 이곳에서는 병에 담긴 느린마을 막걸리가 아닌 갓 만든 생막걸리를 먹어볼 수 있다. 아래 표처럼 느린마을 막걸리는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종류가 있는데, 겨울로 갈수록 발효기간이 길고 단맛 대비 신맛의 비율이 커진다. 겨울이 술꾼들의 막걸리라고는 하지만 나는 정반대로 탄산이 가장 약한 봄 막걸리를 골랐다. 봄 막걸리는 신맛이 거의 없다시피 했고 탄산감도 미미했다. 지금까지 먹어본 막걸리 중 아침햇살과 가장 가까웠고 내 입맛에도 가장 잘 맞았다. 평생 술꾼은 못 될 것 같다.

  안주가 모두 휘황찬란해서 고민을 거듭하다가 삼겹비빔쫄면을 골랐다. 음식 자체는 맛있었지만 막걸리와의 조합은 생각보다 좋지 않았다. 막걸리는 어떤 안주와 어울리는 걸까 분석하며 음미한 결과, 담백하고 식감이 살아있는 음식과 잘 어울린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아무래도 술과 안주의 조합은 맛대맛인 걸까… 소주는 매운 국물류와, 레드와인은 스테이크와 잘 어울리는 것처럼 슴슴하고 부드러운 막걸리도 비슷한 음식과 짝지어 줘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집에서도 전통주 즐기기

  술을 즐기는 마지막 단계는 집에서 술을 먹는 것이다. 밖에서 술집을 찾아가는 것이 남의 공간에서 일시적인 경험을 하는 것이라면, 집에서 술을 먹는다는 건 내 공간에 술을 초대하는 개념이다. 쿠X 같은 곳에서 전통주를 찾아봐야 하나 고민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전통주를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전통주 술마켓’이라는 사이트가 있었다. 증류주/리큐르/막걸리/약주/과실주 등으로 분류가 되어 있었고, 가격대도 만 원 이하부터 30만원 이상까지 다양했다. 아쉽게도 이번에는 직접 주문해보지는 못했지만, 오프라인에서보다 훨씬 다양한 전통주를 접할 수 있기 때문에 조만간 다시 찾게 될 것 같다. 밖에서 술 마실 시간을 내기 힘들거나 집에서 반주로 전통주를 맛보고 싶은 분들께 적극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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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 이전에 비해 전통주에 대한 경험도 할 말도 많아졌다. 하지만 메뉴판에서 시키지 못한 수많은 전통주들, 그리고 술마켓 사이트에 등록된 방대한 양의 술들을 떠올리면 아직 전통주의 1/10도 경험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글을 쓰기 전까지는 전통주가 그동안 먹은 외국 술들과 어떻게 다른지 설명해보려 했으나, 무의미한 시도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통주라는 하나의 범위 안에 묶기에는 제조 방법도, 재료도 너무나 다양하고 맛도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만들어졌다는 이유로 ‘전통주’가 가장 대표적인 이름이 될 필요는 없다. 약주, 청주, 과실주, 막걸리 등 보다 정확한 분류가 통용되었으면 한다. 술의 특성을 담고 있는 이름들이기에 각자의 취향을 찾기도 더 쉽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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