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 하레
“손수 뜨개질한 목도리를 세상에 내놓는 기분”이라던 임대형 감독의 말처럼, <윤희에게>는 어쩐지 얼기설기하면서도 단순하고, 조금은 거칠면서도 따뜻한 느낌을 준다. 그야말로 목도리 같은 영화이다.
그래서인지 <윤희에게>에서는 유독 머플러가 눈에 띈다. 칭칭 감은 머플러는 코 시린 겨울의 계절감을 주는 한편, 필름 카메라와 함께 아날로그스럽고 레트로한 느낌을 준다. 흰 눈밭을 배경으로 검은색 코트를 걸친 윤희에게 꼭꼭 둘러진 청록색 머플러는 유일하게 윤희에게 색을 부여한다.
흰 눈 때문인지, 겨울만 되면 다들 꺼내 입는 검은색 롱패딩 때문인지 내게 겨울은 항상 무채색의 계절이었다. 올해는 머플러로 거기에 색을 더해 보기로 했다. 따뜻함은 덤!
설국 같은 오타루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답게 등장인물들의 목에는 머플러가 꽁꽁 감겨 있다. 영화 속에서 머플러는 인물마다 고유한 색을 입힌다. 소품과 디테일을 세심하게 신경 쓰는 임대형 감독의 작품인 만큼, 머플러도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이 글은, 등장인물들의 메인 머플러를 살펴보는 동시에 에디터의 의미 부여를 한껏 담은 글이 될 듯하다.
윤희의 청록색 머플러는 오타루의 하얀 눈과 시각적 대비를 이룬다. 동시에 차가운 청록색은 겨울 공기와 어울려 서늘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서늘하면서도 도회적인 푸른빛의 바탕에 흑백의 직선들이 두께를 달리하며 겹쳐져 완성하는 체크 패턴은 마치 붓으로 슥슥 그린 느낌을 준다. 끝단에 술을 달지 않고 깔끔하게 코를 막아 처리한 것도 깔끔함과 모던함을 살린다. 윤희 역을 맡은 김희애 배우의 이미지와 결을 같이 하면서도,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윤희의 성격과 잘 어울리는 디자인이다.
“엄마가 아빠보다 더 외로워 보였어.”라는 새봄의 대사와 “너희 엄마는 뭐랄까, 사람을 좀 외롭게 하는 사람이야.”라는 윤희 전남편의 대사로 미루어 볼 때, 윤희는 마치 겨울처럼 메마르고 차가운 사람이었던 듯하다. 스스로에게 벌을 주면서 살았던 것 같다는 말처럼, 한국에서 얇은 외투만 입고 다니던 윤희는 오타루 여행을 떠나며 청록색 머플러를 매기 시작한다. 본인을 닮은 겨울처럼 차가운 색을 두르고도 웃음을 보이는 윤희는 마침내 본인만의 색을 찾은 사람 같다. 그리하여 ‘겨울 같다'는 말도 더 이상 비난이나 벌이 될 수 없다.
영화 초반부에는 이 머플러가 새봄의 목에 둘러져 있는데, 같은 머플러를 함께 쓰는 엄마와 딸의 관계를 짐작하게 하는 장치 같기도 하다.
... 나는 나한테 주어진 여분의 삶이 벌이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그동안 스스로에게 벌을 주면서 살았던 것 같아. 너는 네가 부끄럽지 않다고 했지? 나도 내가 더 이상 부끄럽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래, 우린 잘못한 게 없으니까.
새봄의 메인 머플러는 주황색과 빨간색 사이, 강렬한 오렌지빛을 띤다. 오렌지와 브라운의 세로 스트라이프 패턴에 지그재그 실선이 포인트이다. 마무리가 쫀쫀하고 깔끔하게 되어 있어, 단정하면서도 귀여운 느낌을 준다. 영화 속에서 여기저기 헤집고 다니며, 얘기를 안 나누어 본 사람이 없는 ‘새봄’이라는 캐릭터와 잘 어울린다.
오타루에서부터 청록색 머플러를 매기 시작한 윤희와는 반대로, 청록색 머플러를 매던 새봄은 오렌지색 머플러를 맨다. 어쩌면 둘 다 한국과 분리된, 오타루라는 공간적 배경을 통해 본인의 색을 다시 찾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봄’이라는 이름이 의미하듯, 영화에서 새봄은 쥰과의 만남을 유도하며 겨울 같던 윤희에게 새로운 봄을 가져다주는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한 새봄의 머플러는 마치 따뜻한 봄의 느낌을 담아, 윤희의 청록색 머플러와 대비되는 쨍한 난색이 돋보이는 듯하다.
네, 전 아름다운 것만 찍거든요.
(윤희의 사진을 찍으며) 이쁘다.
영화 속에서 무게감을 덜어 주면서도 정보원(?)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는 경수의 머플러는 캐릭터처럼 귀엽고 재미있게 생겼다. 이름부터가 ‘코믹 머플러’지 않은가. 전투기 모양의 그래픽과 이런저런 패턴들이 어우러져 깜찍한 철부지스러움을 잘 살렸다. 특히 전투기 모양이 비밀 요원 같이 오타루를 따라오고 쥰의 집을 찾아 주는 경수의 캐릭터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경수의 초록빛 머플러는 새봄의 오렌지색 머플러와도 시각적 대비를 이룬다. “어떻게든 되겠지, 뭐.”라고 말하는 경수와 “나도 너처럼 생각 없이 살아보고 싶다.”라고 대답하는 새봄의 관계성이 돋보이는 듯하다.
이 지역에 있는 숙소 다 뒤졌어.
어떻게든 되겠지, 뭐.
등장인물 중 유일하게 쥰의 머플러는 정보를 얻지 못했다. 애초에 영화 내에서 머플러보다는 까만 옷으로 더 자주 표현되는 인물인 데다, 윤희를 만날 때 두른 머플러는 다소 평범해 보이는 회색 머플러이기에 제품 정보를 찾기 어려웠다. 자세히 살펴보면 파란색과 흰색 실의 희미한 체크 패턴이 보인다.
쥰의 머플러는 <윤희에게>에서 등장한 가장 무난한 디자인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러한 모습이 어쩌면 자신을 숨기고 살아온 쥰의 성격과도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 말하자면 제 자신을 숨기고 살았던 거예요. 혹시 료코 씨도 여태까지 숨기고 살아온 게 있다면, 앞으로도 계속 숨기고 살아요.
살다 보면 그럴 때가 있지 않니? 뭐든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질 때가.
에디터의 주관적인 해석과 감상이 많이 들어가긴 했지만, 영화 속에서 머플러의 색과 패턴이 인물에게 부여하는 의미가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다. 이참에 나도 의미를 한껏 담아 머플러를 골라 보기로 했다.
열심히 찾아본 노력이 무색하게 <윤희에게>에 나오는 머플러들은 모두 품절 상태였다. 하지만 글을 쓰려면 보다 적극적인 손민수가 되어야 하는 법. 같은 브랜드의 제품이나 비슷한 제품을 찾아서라도 해 보기로 했다.
[윤희] 애프터눈라이브 Wool Muffler (Blueberry Pancake)
가장 먼저 선택한 것은 역시 윤희의 청록색 머플러.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비슷한 느낌을 내는 머플러는 찾을 수가 없어서, 색깔만이라도 맞춰 봤다. 윤희의 머플러보다는 초록빛이 조금 부족하고, 푸른빛이 더 나는 색감이다. 패턴도 없어 무난 평범해 보이지만, 오묘한 청록색이 흔치 않은 느낌을 준다. 윤희처럼 블랙 코트에 포인트 컬러로 걸쳐서 시크하고 서늘한 분위기를 내 보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사람이 가진 분위기는 옷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하하!
[경수] 메인부스 코믹 머플러 (Red)
다음은 경수의 코믹 머플러를 선택했다. 메인부스 특유의 키치하고 귀여운 무늬가 단색 코디에 잘 어울리는 포인트가 될 것 같았다. 카키색은 품절이라 과감하게 레드를 주문했다. 카키색은 전투기, 빨간색은 낙하산 무늬가 있다. 코디할 때 많이 튀는 색이라 까다로울 것이라는 생각과는 달리, 의외로 아무 옷이나 캐주얼한 포인트를 주며 잘 어울렸다. 특히 무채색 옷에 더하면 발랄한 느낌을 주어 현재 에디터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머플러이다.
[쥰] 헤링본 머플러
앞서 고른 두 개의 머플러가 모두 눈에 띄는 색감이라, 마지막 머플러 코디는 쥰 같은 차분하고 단정한 것으로 정했다. 헤링본 패턴이 있는 회색 머플러로, 단정한 룩에는 단정하게, 캐주얼한 룩에는 캐주얼하게 어울린다. 이 머플러 역시 아무 코디에나 잘 어울려 무난하게 착용할 수 있다. 적당히 눈에 띄지 않으면서 포인트는 살리고 싶을 때 입기 좋다. 다만 패턴이 있는 옷에는 겹패턴이 되어 다소 산만해 보일 수 있으니 주의할 것.
보다 본격적인 손민수템을 찾지 못했지만, 아쉬운 대로 비슷한 머플러나마 찾아 시도해 보았다. 겨울철에 어디가 따뜻해야 가장 방한 효과가 높은지 생각했을 때, 손과 발, 귀 파가 있겠지만 본인은 단연코 목 파이다. 꼭 스스로가 아니더라도, 목이 휑한 사람을 보면 어쩐지 더 춥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머플러는 가장 쉽고 가장 따뜻한 겨울 아이템이라고 생각한다.
머플러는 참으로 단순하다. 네모길쭉하게 생겨서, 그냥 목에 둘둘 감기만 하면 멋과 따뜻함을 동시에 챙길 수 있다. 하나만 있어도 든든하지만, 취향에 따라 다양한 색과 패턴을 몇 개만 구비해 두어도 겨울철 무채색의 아우터에 색감을 불어넣을 수 있다. 평소 본인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색이든, 또는 아주 새롭게 느껴지는 색이든 상관없다. 이런저런 매듭에 따라서도 색다른 포인트를 줄 수 있으니 올 겨울은 머플러를 통해 보다 다채롭게 즐겨 보는 것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