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 먼지
스튜디오 지브리 작품 속 음식은, 가장 외롭고 삭막한 순간에 따뜻한 온기를 더한다. 소피가 캘시퍼에게 후라이팬을 들이밀고 요리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하울의 차갑고 삐걱이는 성이 밝아졌고, 엄마 아빠를 구하기 위해 애를 쓰는 치히로에게 하쿠가 주먹밥을 건넬 때 비로소 치히로는 안심하고 서러울 수 있었다. 그런가 하면 음식은 지브리 특유의 몽글몽글한 분위기를 고조하는 역할을 맡기도 한다. 가족의 아침 식사를 챙기는 사츠키가 만든 도시락, 키키가 머무르는 베이커리의 빵과 선물 받은 케이크가 그렇다.
무엇보다 지브리 애니메이션 속 음식은 도대체 왜 이렇게 맛있어 보이는 것인가! 와구와구 먹어치우고 싶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래서 나를 위해 따뜻한 밥을 ‘여러 끼’ 차려먹기로 했다. 하지만 집 밖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내가 집에 와서 까지 집밥을 차려먹는 건 오히려 피곤한 느낌이다. 하루를 끝내고 집에 왔는데 또 집밥을 차려먹는 것은 일이 되지만, 오늘 하루의 점심을 위해 미리 식사를 준비하는 것은 뿌듯하달까? 어쨌든 하루 일과의 중심을 차지하는 점심 식사를 잘 차려 먹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래서 지브리 애니메이션 속 음식을 도시락으로 해 먹어 보기로 했다. 뜨숩고 몽글몽글한 지브리의 감각을 내 일상으로 초대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나는 진짜 요리를 못하기 때문에, 무지 간단한 것부터 제일 공을 들어야 하는 어려운 것까지 단계를 나눠 도시락을 만들어보려 한다.
내게 주어진 도시락 장비는 두 개. 3단 락앤락 도시락과 시스테마 샌드위치 박스다. 이 락앤락 도시락은 밀폐통, 오픈통, 수저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밀폐통은 흘릴 우려가 있는 음식을 들고 다니기 좋다. 시스테마 샌드위치 박스도 아주 유용한 아이템이다. 난 주로 샌드위치를 자주 싸들고 다니는데, 대충 싼 샌드위치를 저 박스에 넣고 다니면 무게도 가볍고 모양도 유지되어 요긴하게 쓰고 있다.
하울 정식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주재료는 베이컨과 계란.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려면 곁들여 먹을 빵과 홍차, 에멘탈 치즈가 필요하다. 생각보다는 이것저것 재료가 많이 필요하지만 모양을 예쁘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이 하울 정식의 장점이다. 하지만 첫 번째 퀘스트이니만큼, 하울 정식의 핵심만 담아보려 했다. 준비하는 재료는 베이컨, 계란 2알, 그리고 모닝빵!
일단 베이컨과 계란을 부쳤다. 해바라기씨유 오일을 두르고 베이컨을 먼저 부치기 시작해서, 대충 구운 다음에 계란 두 알을 깨 넣었다. 제법 하울 정식 비주얼이 나오는 걸? 하고 방심한 찰나 계란이 깨졌고, 계란이 익어갈수록 계란과 베이컨을 한 후라이팬에 넣고 굽는 건 비주얼을 포기한 짓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요리의 비주얼도 중요하지만, 요리의 8할은 그래도 맛이 아닌가…! 맛만 좋으면 됐지라는 마음으로 날 위로했다.
베이컨과 계란을 부쳐서 도시락통 밀폐통에 고이 접어 넣고, 모닝빵 세 알을 다른 한 통에 구겨 넣었다. 아주 딱 들어차는 게 마음에 든다. 참고로 저 모닝빵은 냉동이었어서 전자레인지에 물과 함께 2분 돌렸다. 외출하기 전 급하게 만드느라 냉장고에서 재료 꺼내는 데에서 도시락통에 넣어 외출까지 20분 안쪽으로 끝!
오후 4시쯤 조금 늦은 점심을 먹었더니 해가 저렇게 깊이 들어오는 학교 도서관. 어쨌든 구석에 자리를 잡고 도시락통을 펼쳐보았다. 생각보다 비주얼이 나쁘지 않은데? 이제 와구와구 먹으면 된다.
계란에는 따로 간을 하지 않았는데, 베이컨이 워낙 짭조롬해서 그런지 충분했다. 그리고 모닝빵을 충분히 세 알 챙겨온 게 신의 한 수였다. 이 조합은 빵이 없이는 도저히 이 베이컨의 짭조롬함을 견딜 수 없겠지 싶다. 모닝빵 자체도 꽤나 담백하고 고소해서 계란과 베이컨과의 조화가 매우 좋았다. 원래 베이컨을 한 끼에 이렇게 많이 먹나…? 싶지만 하울 정식은 그 유명세답게 맛있었다.
빵에 소스, 양상추, 계란이 전부인 그리 복잡하지는 않은 샌드위치. 하지만 요알못인 내게 가장 관건은 소스다. 소스의 정체를 정확히는 알기 어렵지만, 가장 무난하게 머스터드 소스를 선택했다.
그런데 이 고양이의 보은 샌드위치의 핵심은 모양이다. 샌드위치 케이스에 잘 들고 가는 것이 관건! 계란만 부치기는 심심하니까 샌드위치 햄을 함께 구웠다. 이미 둘을 함께 굽는 비주얼은 하울 정식에서 충분히 보여주었으니 스킵. 양상추를 씻어서 채에 털고, 빵 한쪽과 머스터드 소스를 준비했다.
먼저 빵에 머스터드 소스를 뿌리고, 양상추를 곱게 쌓았다. 그 위에 햄과 계란을 올려서 샌드위치 박스에 푹 눌러 담았다. 고양이의 보은 속 샌드위치 비주얼과 비슷하게 빵을 더 올리지 않고 이대로 마무리했다.
역시나 오늘도 학교 도서관. 샌드위치 박스를 열었더니 아직 잘 쌓여있는 샌드위치의 모양이 아주 마음에 든다. 위를 덮은 빵이 없기 때문에 마치 피자처럼 한 손에 샌드위치를 들고 와구와구 먹었다. 계란과 양상추, 머스터드의 조화가 생각보다 좋았고, 아주 싱싱한 양상추가 샌드위치에 신선함을 더했다. 평소에 야채 없이 먹던 샌드위치와는 정말 달랐는데, 그래서 파는 샌드위치들에서 다들 야채를 잔뜩 추가하는구나! 를 새삼 느끼게 된 식사였다.
마지막 단계는 이웃집 토토로에 나오는 사츠키의 도시락. 어렸을 때 가장 자주 봤던 지브리 영화가 이웃집 토토로였는데, 그때마다 사츠키가 만들어주는 이 도시락이 그렇게 먹고 싶었다.
이 도시락을 위해 필요한 준비물은 생각보다 훨씬 생소한 재료들이다. 밥 위에 올라와 있는 빨간색 방울토마토같이 생긴 저것은 일본의 매실 장아찌인 우메보시다. 일본의 도시락이나 오니기리(주먹밥)에 자주 들어가는 재료라고 한다. 한국의 매실 장아찌가 달달한 간장에 절이는 거라면, 우메보시는 소금에 절이고 시소라는 향신료를 첨가한 거라 무지 시고 짜다고 한다. 도시락에 밥이 저렇게 많은데, 우메보시를 한 알 넣는다고? 이해가 되는 맛이란다.
가운데의 저 생선은 빙어라고 한다. 이자카야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시샤모 구이로 더 유명한 바로 그 빙어. 하나만 구워서 도시락에 올릴 예정이지만, 또 남은 빙어는 구워서 안주로도 먹을 수 있기에 냉동으로 구매했다.
저 분홍색은 도대체 무엇인고, 하면 사쿠라덴부라고 한다. 사쿠라덴부는 대구 같은 생선을 찌거나 삶아서 살을 발라 잘게 부순 다음 분홍색 색소를 입힌 재료라고 한다. 진짜 희한한 고명이다. 굳이 그 생선을 왜 삶아서 잘게 부수며, 거기에 왜 분홍색 색소를 입히는 것인지 이해는 안 되지만 아마도 예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사쿠라덴부를 직접 만드시는 분도 있지만, 도저히 집에서 만들기 어려운 난이도의 재료이기 때문에 네이버 쇼핑에서 사쿠라덴부를 구매해 보았다. 무려 일본에서 건너온 사쿠라덴부! 우메보시, 빙어, 사쿠라덴부, 그리고 완두콩 통조림까지 구매를 완료했고 도시락에 쓸 만큼 덜어보았다.
밀폐통 바닥에 햇반을 고이 깔고, 세 구역으로 나눠 한쪽엔 사쿠라덴부, 한쪽엔 완두콩, 가운데에는 우메보시 한 알을 올려주었다. 사쿠라덴부는 봉투를 여는 순간 생선 냄새가 후욱 올라왔다. 이건, 많이 넣었다간 아주 큰일이 나겠다 싶어 적당히 뿌려서 펴주었다. 완두콩 통조림도 생전 처음 먹어보는 것이지만 겁먹지 않고 구석탱이에 몰아넣었다. 우메보시는 열었더니 매실 장아찌 냄새였다. 조금 달달하다는 제품을 시켜서 그런 듯하다. 어쨌든 우메보시도 겁먹지 않고 가운데 얹어주었다.
이렇게 하고 보니 분홍색과 연두색의 조화가 생각보다 예쁘다. 우메보시 색상이 주황빛이어서 아쉽긴 했다. 그런데 무엇보다 또 한 가지 아쉬움은 밥이 현미밥이라는 것이다. 도시락을 만들기 시작할 때에는 별생각 없이 발아현미밥 햇반을 돌려서 깔았는데, 막상 예쁜 색상의 우메보시와 완두콩을 얹고 나니 바탕색이 거무죽죽했다. ㅠ.ㅠ 혹시 토토로 도시락을 만드실 예정이라면, 밥은 꼭 현미밥이 아니라 백미밥으로 하시길!
이제 하이라이트인 빙어 구이에 나섰다. 커다란 후라이팬에 하나만 덜렁 구우려니 상당히 웃겼지만, 식용유에 이리저리 빙어 한 마리를 구웠다. 냉동실에서 한참 꺼내놓았던 터라, 해동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살짝 얼어 있었다. 그치만 그냥 구웠다. 도시락이 길쭉한 탓에 빙어를 세로로 놓기는 어려워, 가운데 띡 빙어를 올렸다.
이제 도시락을 먹어보자. 사실 이 도시락은 만들기 전부터 걱정이 많았다. 난생처음 먹어보는 빙어와 사쿠라덴부, 우메보시에 딱히 좋아하지 않는 완두콩까지. 과연 내가 이걸 다 먹을 수 있을까? 만들면서도 내가 먹기 위한 점심 도시락을 만드는지 뭔지 헷갈릴 정도로 조금 찝찝했다.
일단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도시락은 실패다. 결국 다 못 먹고 나가서 편의점에서 빵을 다시 사 먹었다. 왜 실패였는지를 돌이켜보기 위해 재료 하나하나 후기를 달아보겠다.
의외로 사쿠라덴부는 괜찮았다. 봉투를 열자마자 끼치는 바다 향에 걱정을 했지만, 밥과 함께 먹으니까 달짝지근한 맛이 났다. 뭔가, 불량식품 먹는 느낌? 꾸이꾸이 같은 과자의 생선 맛이 나지만서도 달달한 맛을 상상하면 어느 정도 비슷하다. 밥 위에 뿌려먹는 후리가케 정도로 생각해도 좋을 것 같았다. 왜 사쿠라덴부를 밥과 섞어 주먹밥을 만든다는 건지 이해할 수 있는 맛과 식감이었다.
빙어 역시 고소하니 괜찮았다. 다만 해동이 덜 된 상태에서 구워서 그런지 원래 그런 것인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살짝 비렸던 것을 제외하면 그냥 딱 생선 맛이다. 이 빙어 구이를 맛보면서, 좀 더 바싹 구운 직후에 마요네즈에 푹 찍어 먹고 싶다고 혼자 생각했다.
완두콩은 뭐, 그냥 아무 맛도 안나는 완두콩이다.
그런데 문제는 저 우메보시였다. 이미 우메보시가 정말 엄청 짤 수 있다는 걸 생각하고 한 입만 작게 베어 물었다. 그런데도 ‘와… 이건… 이건 뭐지?’ 그냥 뭔가 물컹한 무언가를 소금물에 푹 절여놓은 느낌이었다. 향은 꽤 매실 장아찌와 비슷해서 내가 조금 방심했었나 보다. 한 입 베어 물고 맛을 본 이후에 다시 뱉어서 휴지에 고이 접어 이별했다. 더 큰 문제는 우메보시를 밥에 한참 올려놓았더니 밥에 저 우메보시가 스며든 탓에 밥에 우메보시 맛이 났다는 것이다. 나는 먹기를 중단하고 말았다.
토토로 도시락으로 놀란 가슴을 달래주기 위해, 집에 와서 우유에 데우고 꿀 한 스푼 넣어서 데웠다. 머그컵에 우유를 담아 2분 정도 데우고, 딱 이 짤에 나오는 만큼 꿀을 넣어 먹으면 된다. 참고로, 우유를 한 번에 2분을 넣어서 돌리진 않길 바란다. 그러다 우유가 전자레인지 안에서 터지는 수가 있다. 나도 알고 싶지 않았다… 1분 넣어서 돌리고, 살펴본 후에 30초~1분 정도 더 돌려주면 된다.
꿀우유를 만드는 과정도 다사다난했지만, 그 맛은 놀란 가슴 달래주기에 충분했다. 커피맛이 안나는 따뜻한 연유 라떼 느낌. 달달한 꿀우유 한잔에, 포뇨와 소스케가 한 밤 중 무릎을 끌어안고 홀짝이던 순간이 떠오른다. 절로 힐링이다.
평소에도 도시락을 많이 싸지만, 본가에 사는 관계로 보통 엄마가 아침으로 해놓고 남은 음식을 싸 오는 편이다. 그러다 보니 내가 불을 들고 직접 요리하지는 않았고, 해봤자 앞에서도 말했듯 빵에 잼이랑 치즈 정도 넣는 정도였다. 그런 내가 짧은 시간 안에 불까지 써서 요리를 한다는 것은 살면서 꼭 한 번은 해봐야 할 퀘스트를 깬 것처럼 뿌듯한 일이다.
감성글로 이 글의 시작을 열었지만 어쩌다 보니 조금 코믹하게 음식 후기를 쓰게 되었다. 토토로 도시락을 먹으며 마음고생도 했지만, 도시락을 만들어 먹으며 스스로가 대견했던 것이 사실이다. 비주얼과 무관하게 나를 대접하는 기분은 일상을 굴려나갈 든든함을 준다.
어쩌면 지브리 속 음식도 그런 역할을 하는 셈이다. 낯선 곳에서 낯선 마음과 함께 포기하지 않을 힘을 주는 것. 오로지 자신을 대접하기 위해 정성을 쏟는 시간을 가지길 추천한다. 그 시작은 지브리의 도시락 만들기로 재미있게 시작해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