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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binsoon Dec 23. 2017

공백으로 가득 찬 이야기

데이비드 로워리, <고스트 스토리>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는 메시지를 전달하기에 효율적인 플롯 형태다. 중간 광고와 PPL이 범람하는 TV 드라마와 다르게  공간을 채우는 영상과 음향, 무엇보다 2시간 동안 극장 의자에 앉아 있어야 하는 강제성 덕분에 영화를 접하기 위해 관객은 자신의 시간을 양도해야 한다. 감독과 제작진은 양도받은 2시간 동안 자신들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어떻게 전달하는지 고민하면서 촬영과 편집에 상영시간보다 수 백, 수 천 배가 되는 시간을 할애한다. 이 과정에서 발달한 다양한 편집기술은 산만한 일상에 뒤덮인 누군가가 스크린 앞에서 '관객'으로서 몰입하도록 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화려한 편집과 영상 기술에 뒤덮인 영화는 알맹이인 메시지를 제대로 전달하기보다는 화려한 포장을 뒤덮어 놓아 관객은 극장 밖을 빠져나오는 순간 재미는 있었지만 무슨 의미가 있었는지는 모르게 된다. 거기에 평론가들은 다양한 복선과 중첩된 메시지, 캐릭터의 입체성을 '명작'의 기준으로 세우면서 메시지가 단순한 영화는 상업적인 영화라 외면받는다.


 그러한 '명작'의 기준이 타당한지 여부와 상관없이 단순한 메시지의 영화가 외면받는 건 조금 부당해 보인다. 문화 영역에서 우월을 나누는 기준을 세울 수 있다면 그건 분명 다양성이다. 그런 면에서 <고스트 스토리>는 영화계라는 생태계가 지속 가능하도록 필요한 요소다.


 작곡가인 남편과 그의 아내는 한적한 교외의 집으로 이사한다. 간밤에 이상한 기척에 잠을 깬 그들은 그게 무엇인지 확인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던 중 아무런 전조도 없이 남편은 교통사고로 죽는다. 모포로 얼굴이 덮인 남편의 시체는 잠자코 있다가 문득 일어선다. 모포로 뒤덮인 그 형상은 눈으로 보이는 부분에 두 개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 무언가는 조용히 집으로 향한다.


 이야기는 그 '무언가'의 시점에서 진행하면서 그 집을 거쳐가는 모든 것을 관조한다. 남편이 죽고 남겨진 아내, 새로 이사 온 가족, 시간이 흘러 철거된 집 위에 세워진 거대한 빌딩, 지어졌던 모든 건물들은 사라지고 남겨진 초원. 유령은 흰 모포를 쓴 채 한 때 집이었던 그곳을 배회한다.


 일단 분명한 건 이 유령은 지박령이다. 집 밖을 나가지 않는다. 극히 한정된 공간을 무대로 하는 영화는 대신 무한한 시간을 펼쳐낸다.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는 유령의 이야기 정도라 생각했던 가벼운 기대감은 이야기 반에 아내가 떠난 뒤 사라지고 하염없이 흘러가는 시간 앞에서 약간의 움직임만을 반복하는 유령을 관찰하면서 관객은 상념을 펼칠 수밖에 없다.


 대사도 거의 없고, 공간을 극단적으로 한정하고, 기승전결도 없어 보이는 이 영화에서 명확한 건 오직 메시지다. 유령이라는 대상에 투영한 무한히 흘러가는 시간 앞에 선 존재는 보는 이마다 다른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다. 90분 남짓한 짧은 러닝 타임에도 불구하고 공백으로 가득 찬 영화에서 적극적인 관객은 자신의 생각을 공백에 채워 넣는다. 자신이 경험했던 과거와 거기에서 남은 그리움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게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기존의 영화와는 원체 형태가 다르기에 비교 기준도 불분명할 수밖에 없는 <고스트 스토리>는 개인의 경험에 따라 그 답이 다를 수밖에 없는 시간과 존재라는 철학적 소재를 표현하면서 철저하게 공백으로 채워 넣었다. '공백으로 채워 넣다'라는 모순적 표현이 가능한 건 글이 아니라 영화이기 때문이다.


 지나간 과거에 그리움을 떨쳐낼 수 없는 누군가는 아마 대중에게 외면받을 게 분명한 이 영화가 극장에서 내려지기 전에 보고 오길 권한다.


 마치 유령이 된 것 같은 기분으로


※ <브런치 무비 패스>를 통해 관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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