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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binsoon Jun 23. 2020

그는 사랑만 팬다

<라이크 크레이지> <우리가 사랑한 시간> <조>, 드레이크 도리머스


미칠 듯 사랑했던 연인이 만날 수 없는 환경에 놓이면 그 열정은 어떻게 변화하는가?
<라이크 크레이지>
소개팅 어플을 통한 짧은 만남을 이어가던 남녀가 사귀게 되면 그 관계는 안정적일까?
<뉴니스>
서로에게 끌리는 마음이 자연스러운 게 아닌 만들어진 거라면 그들의 사랑은 진짜인 걸까?
<조>



<라이크 크레이지>, 2011년 작


 '드레이크 도리머스'라는 감독의 작품을 하나씩 살펴보면 마치 사랑이라는 관념적 대상을 실험실의 흰색 쥐마냥 다양한 상황에 놓아두고 생존 가능한지 살피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라이크 크레이지>에서는 영국과 미국이라는 거리를 사이에 두고 젊은 커플의 사랑이 어떻게 변하는지 살피고, <우리가 사랑한 시간>에서는 소녀와 친구의 아버지이자 선생님인 남자의 사랑이 지속 가능한지 살피고, 가장 최근에 개봉한 <조>에서는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의 사랑이 과연 지속 가능한가를 살핀다.


 감독은 사랑의 감정을 쉽게 증폭시키는 작위적인 연출을 하지 않는다. 극적인 클로즈업이나 슬로우 모션, 로맨틱한 BGM을 쓰지 않는다. 그저 카메라는 숨소리가 들릴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그들의 대화를 들여다보다. 대화를 통해 교감하고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에 긴장감이 생기면서 숨소리가 들려온다. 그렇게 사랑에 빠진 순간을 1열에서 본다.


 그의 작품에서 사랑이 시작되고 연인이 되는 건 대부분 중반부 이전이다. <라이크 크레이지>에서 애나는 제이콥에게 마음을 전하는 쪽지를 남기고 제이콥은 그걸 읽은 뒤 카페에서 함께 대화를 나눈다. <뉴니스>에서는 마틴이 소개팅 어플로 가브리엘라에게 말을 걸고 펍에서 나누는 대화를 통해 가까워진다. 일상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주인공들 간에 사랑이 피어나는 상황 속에서 로맨틱한 분위기에 감독은 몇 가지 새로운 조건을 이들의 관계에 제시한다. 마치 주사기로 실험체에 균을 주입한 뒤 주어진 환경 속에서 실험체의 변화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보듯 말이다. 이 상황에서도 과연 그들이 사랑의 감정을 유지할 수 있을까?


<우리가 사랑한 시간>, 2013년 작


 카메라는 이후 현미경이 되어 서로가 특별하다고 느낀 연인들의 감정선을 섬세한 시선으로 따라간다. 서로가 특별하다 생각했던 연인들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의심하면서 관계의 위기가 시작된다. 불치병이나 삼각관계 같은 외부적 요소가 개입하지도 않는다(바람피우는 장면 같은 건 나오지만 갈등의 주된 요소는 아니다). 중요한 건 각자의 내적 변화다. 영국과 미국간의 거리를 두고 쉽게 만날 수 없는 연인이 있고(라이크 크레이지), 이미 가정을 일군 남자와 나이 어린 여자라는 사회적 제약(우리가 사랑한 시간), 사귀기 전 매번 데이트 어플을 통해 상대를 찾아 헤매던 남녀가 느끼는 서로에게 얽매이는 관계의 권태로움(뉴니스) 같은 것들에서 로맨스 영화에서 볼 수 있는 판타지스런 설정은 찾을 수 없다. 한때 뜨거웠던 감정은 그런 제약 속에서 점차 사그라들고 영화 속 연인들은 현실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거나, 아니면 극복하기 위한 전혀 새로운 방법을 찾는다. 이윽고 영화는 결말을 맞이하는데 언제나 해피엔딩은 아니다. 영화가 끝날 때쯤 관객은 마치 자신이 하나의 연애를 경험하고 온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리고 모두가 알고 있듯 그 결말이 언제나 'happily ever after'가 아닌 걸 우리는 알고 있다.


<이퀄스>, 2015년 작




 가끔씩 SF적인 설정을 부여하기도 하는데, 감정을 느끼면 안 되는 디스토피아적 미래 사회라는 설정(이퀄스)을 두기도 하고 자신을 만든 과학자와 사랑에 빠진 인간형 로봇(조)이 나오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들의 갈등요인은 무척이나 개인적이다. 인간형 로봇인 '조'와 그녀를 만든 과학자 '콜'이 갈등하는 이유는 그들이 느끼는 감정에 대한 의심이다. 콜이 조에게 끌리는 건 그가 만든 로봇이기에 그가 좋아하는 여성상이 이식된 것이기 때문이며 로봇인 '조'가 콜에게 사랑에 빠지는 것은 그저 그렇게 설정되었기 때문일 수 있는 것이다. 로봇과의 사랑이지만 그들이 내면의 고민을 대하는 자세는 아이러니하게도 무척이나 인간적이며 사색적이다. 감독은 SF적인 설정에서 놓인 인물들을 공감 가능하게 만들어 놓음으로써 관객은 플롯이 진행될수록 등장인물이 처해진 상황에 자신을 쉽게 대입할 수 있다.


 1-2년 간격으로 계속 작품을 내놓는 다작형 감독인 드레이크 도리머스는 이렇듯 계속해서 사랑이라는 주제 한 가지만을 파고든다. 그렇기에 그의 필모그래피를 하나씩 따라가 보면 쉽게 '사랑은 이런 거다' 식으로 결론을 섣부르게 내놓지 않고 계속해서 가설을 세우고 새로운 조건에서 실험을 계속하는 연구자의 면모를 느낄 수 있다. 물론 사랑이라는 주제를 다루지만 어떤 조건은 전혀 변화를 주지 않는다. 그의 작품에서는 동성 간의 연애를 다루지 않으며, 또한 인종적으로 백인에 국한된다.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는 의견이 나올 수 있으나 이는 종속변수를 유지한 채 독립변수를 조작하는 연구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해가 된다.


<뉴니스>, 2017년 작


 드레이크 도리머스라는 낯선 감독을 소개하는 글의 마지막에 남는 건 과연 우리가 이 작품을 봐야 할 당위가 있는가라는 의문이다. 독특한 소재의 넷플릭스 영화가 범람하는 현재의 시점에서 한 작품도 아니고 한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따라가 보라고 권할만한 이유가 있을까? 그 대답 중 하나는 그의 작품들을 통해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수 있다는 이다. 영화마다 제시한 그의 질문들은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마주할 수 있는 것이기에 간접경험으로서의 영화의 역할을 기대할 수 있으며 이는 어쩌면 아름다운 영상으로 구현된 논문을 넘기는 것 같다. 그렇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볼 수는 없으나 상대적으로 '연참시'보다는 연인과 사랑에 관한 깊은 통찰을 얻을 수 있다.


 만일 그의 작품을 처음 접한다면 <라이크 크레이지>를 추천한다. 말 그대로 서로에게 미쳐 있었던 커플이 미국과 영국이라는 공간적 제약 때문에 미쳐가는 모습은 사랑에 담긴 열정이 어떻게 변화하는가를 볼 수 있다. 무모한 열정으로 가득했던 젊은 연인에게 공간이라는 장애는 낭만적인 관점으로 보면 별 거 아닌 듯 하지만 현실에서는 커다란 제약일 수 있다는 것이 영화 속에서 드러난다. 영화는 어설프게 낭만을 쫓지 않고 쉽게 현실로 도피하지도 않는다. 무려 제니퍼 로렌스의 앳된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건 덤.


<조>, 2018년 작


한 번쯤 '사랑이 뭘까'라는 질문의 답을 간절히 원했던 이에게 그의 작품을 권한다.
물론 그의 영화가 답을 주지는 않는다. 그저 다음 질문으로 넘어갈 길을 제시할 뿐이다.



 낯선 서로가 익숙해지고 익숙한 듯했던 상대가 다시 낯설어지는 사랑의 과정은 로맨틱과 긴장감을 오간다. 감독은 이를 몽환적인 영상 속의 연인이 주고받는 시선과 호흡의 교차만으로 표현한다. 서로에게 집중된 시선은 어느새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고 같은 속도의 호흡은 어느새 흐트러져 있다. 그 과정을 바라보는 건 나름의 중독성이 있어서 거기에 매력을 느낀다면 어느새 그의 필모그래피를 따라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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