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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binsoon Mar 05. 2021

영화의 공백을 자신의 경험으로 채운다면

<미나리>, 정이삭

스포일러 정도 - ★★


★ - 가벼운 인물 소개
★★ - 전반부 스토리
★★★ - 결말 직전까지
★★★★ - 결말이고 반전이고 전부 다
★★★★★ - 시리즈물일 경우 전작 후속작 가리지 않고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딸, 아들로 이루어진 한국인 가정이 미국의 낯선 땅, 아칸소에서 밭을 일구면서 살아가는 영화다. 아버지는 가족에게 무언가 이루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고집을 피우고 어머니는 그런 변화를 달가워하지 않으면서 마지못해 따라가고 어린 아들과 딸은 지루한 부모의 눈치를 보다가도 시골에서도 무언가 재미있는 게 없을까 찾아다닌다. 그곳에 한국에서 할머니가 온다. 그리고 같이 살아간다.


 그저 한 가족의 이야기다.


 배경음악보다 풀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나 목재 건축물을 밟는 소리가 더 많이 들리고 카메라의 움직임이 적은 다큐멘터리식 연출과 가족을 삶을 주요 소재로 삼았다는 점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떠오르지만 결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느껴진다. 미국이라고 해도 이제는 익숙한 뉴욕이나 LA와 달리 아칸소라는 시골을 배경으로 하고 80년대 초 정도로 짐작되는 시간적 배경은 이질감을 느끼지만 가족 일원의 표정 하나하나를 따라가는 연출은 쉽게 공감할 수 있는 포인트가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맨날 싸우고 아들과 딸은 그 모습에 방으로 피하고 뒤늦은 동거를 시작한 할머니는 가족의 일원이라고 느끼기엔 어딘가 거리감이 있다.


 그러한 가족의 모습은 분명 쌍용동에 있는 15년 된 24평 아파트에 사는 가족들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미국의 들판 한가운데 놓인 이동식 목조 주택이라는 집과 초록빛 대지에 평평하게 비추는 햇빛에 반사되는 파스텔빛 풍경은 묘한 기시감이 느껴진다.


 스스로가 지운 책임감에 짓눌리는 스티븐 연의 짜증과 피로가 섞인 연기나(한국어 대사가 대부분인데 생각보다 발음이 명확해서 놀랐다) 남편을 못마땅해하면서도 따라갈 수 없는 망설임 가득한 한예리의 연기, 그리고 어딘가 어리숙하고 할머니답지 못한(?) 할머니의 모습을 보여주는 윤여정의 연기는 자연스러운 앙상블을 이룬다. 물론 어린 동생보다 부모의 눈치를 많이 봐야 하는 장녀를 연기한 노엘 조의 연기와 제멋대로인 막내인 듯하면서도 빨리 철이 드는 앨런 킴의 연기 역시 나무랄 데는 없다. 그들은 정말로 한 가족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사건이 극을 이끌어 가는 구조가 아닌 그저 한 가족의 모습을 묘사했기에 이야기 전개에는 공백이 느껴진다. 하지만 거기에 관객 자신의 가족의 모습을 비추면 자연스럽게 이야기의 공백을 채울 수 있다. 나는 책임감에 짓눌려 가족과의 소통을 등한시하는 아버지(제이콥) 모습에서 한 달에 두 번밖에 안 쉬시고 일하면서 멀쩡한 모습보다 술에 취한 모습을 더 많이 보여준 우리 아버지의 모습을 봤고 요리를 못 하고 애들을 다루는 데 있어서도 어딘가 어리숙한 할머니(순자)의 모습에서 사골 국물에 라면을 끓여주던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의 모습을 떠올렸다. 이야기는 섣부른 신파로 극을 고조시키지 않고 가족 간의 긴장감과 느슨한 공백을 번갈아 보여주면서 관객으로 하여금 자신의 가족을 떠올릴 수 있게 하는 보편성을 가진다.



 누구나 좋아할 만한 영화라고는 할 수 없지만 누군가에게는 분명 깊은 울림을 줄 수 있는, 그런 영화다.


 자극적인 조미료 맛보다 제철 나물의 슴슴하지만 신선한 질감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는 감동을 원한다면 보러 가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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