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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binsoon Jun 08. 2021

하늘을 바라보는데 안경은 필요 없다

5월 월간 일기

 지난달까지 썼던 월간 일기라는 표현 중 일기라는 표현이 걸렸다. 일기(日記)라는 말 자체에 매일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는데 월간(月刊)이라는 말과 상호모순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 달에 있었던 일기를 모은 글이니 그럭저럭 시적 허용 비슷한 걸로 받아줄 수 있지 않을까? 시는 아니지만.


# 한 경력의 끝에서


 일을 곧 그만둘 것 같다. 2017년 8월 28일에 입사했고 연차로는 5년에 만 4년이 다 되어간다. 대학에 입학하 졸업할 수 있는 시간이다. 일을 하면서 겪었던 경험들을 한 번에 정리하긴 어렵다. 내가 선택했던 일이지만 대부분은 버티는 시간이었고, 아주 가끔씩만 즐거움을 느꼈다. 뻔하지만 끝에 남는 건 시원섭섭하다는 말이다. 심야영화를 보러 갈 때의 극장의 차분한 분위기가 좋아서 시작했건만 지금은 밤늦게까지 일하는 게 그저 피곤할 뿐이다. 출근 전이나 퇴근 후 영화 한 편 보는 게 좋았던 시절은 끝나고 지금은 정시에 맞춰 출근하고 퇴근할 때 최대한 짧은 동선으로 극장 밖으로 발길을 돌린다.



 사실 퇴사하고자 하는 마음은 올해 초부터 꽤 확고하게 있었지만 역시나 걸리는 건 은행 대출과 이직 준비의 어려움과 새로운 시작에 앞선 불안함이었다. 그즈음에 코로나 장기화로 회사에서는 연차 조기 소진을 독려하면서 주 4일 근무를 할 때라 일에 대한 부담도 적어서 그럭저럭 다녔다. 하지만 어떤 계기로 오랫동안 놓았던 긴 글 하나를 다시 작업하면서 글을 향한 마음이 꽤 진지해졌다. 여전히 책상에 서너 시간 넘게 앉아 글을 쓰는 건 고역이기도 하지만 어깨가 뻐근할 때까지 글을 쓰고 기지개를 켜고 창문 밖 지는 해를 바라볼 때 일에서 얻지 못한 성취감이 느껴졌다.



 출근길에는 전철역을 가로지르는 긴 다리가 있다. 그 다리 끝에 바로 직장이 있었는데 출근길에 나는 그 다리의 3분의 2를 넘었을 즈음에 유턴해서 적당한 카페를 찾아 글을 쓰러 가는 상상을 했다. 하지만 그 불안정한 삶을 맞이할 각오는 없었기에 이직처가 정해지고 난 뒤 약간의 텀이 있을 때 집중적으로 써 보자, 정도만 생각했다. 그렇지만 언제였을까, 아마 자정 즈음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며 퇴장문을 열고 있을 때였나? 어두운 상영관 안에서 나는 시골의 작은 집 마당에 나무 의자에 앉아 노트북 하나 앞에 두고 글을 쓰는 상상을 했다. 지금 있는 공간에서 다른 공간을 상상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상상 속 공간이 점점 구체화되었다. 그러면서 든 결론은 한 달 정도 글에만 집중해보는 건 어떨까였다. 다른 모든 건 뒤로 젖혀두고 매일 무슨 글을 쓸지 생각하고, 쓴 걸 뒤집고, 다시 쓰면서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가 만족할 만한 이야기를 하나 완성하자, 그런 생각을 했다. 일시적인 충동일까 하는 불안감은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불현듯 밀려온다. 남들이 쉬이 납득하지 못하는 이유지만 한 번은 그렇게 해보자라는 마음은 확고했고 다음 달까지만 일하기로 정했다. 시청률이 1프로도 안 나오는 드라마를 굳이 연장 방영까지 하는 식으로 직장 생활을 이어왔다. 이제야 정지 버튼을 누른다. 이어서 재생할 새로운 영화는 어떨까 궁금하다. 기대와 불안감은 언제나 함께다.


 목표는 6월 퇴사, 가능하면 말일까지 하고 깔끔하게 나가길 원한다. 한 경력의 끝은 담담히 다가온다.


 # 춘천과 제주도


 2박 3일 휴가가 연달아 있어서 짧은 여행을 두 번 다녀왔다. 한 번은 춘천에 있는 작은 공유 서재 겸 북 스테이 공간이고 한 번은 제주도 애월에 있는 친구의 한  살이에 하루 끼어들었다.


 ', 서재'라는 이름의 그 공간은 폐가를 리모델링해서 만든 작은 가게로 나무가 가득한 인테리어에 세세한 부분까지도 주인의 취향이 반영되었다. 그 공간 지붕 아래에는 작은 다락이 있는데 ',다락'이라는 그 공간은 매월 15일 지원서를 쓴 뒤 주인장의 낙점(?)을 받으면 최대 5일 동안 그 공간을 독차지할 수 있는 자격을 얻는다. 대가는 5년 뒤에 자신이 가치 있다 생각하는 물건 하나.



 아마도 유연한 근무스케줄 덕분에 갈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노력에 비해 얻은 호사는 어마어마했다. 마당에 커다란 라일락 나무가 환영하는 그 공간에 밤 7시 이후 오롯이 나만이 독차지하는 경험은 정말이지 황송했다. 거기에 둘째 날에 있었던 서재지기님과의 대화는 예정했던 시간을 어느새 훌쩍 넘길 정도로 즐거웠다. 남자와 둘이서, 그것도 술이 아닌 티백이 들어간 차를 두 번이나 우려내면서 마시면서 쉬지 않고 대화를 나누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상대는 자연스럽게 나를 드러낼 수 있는 말을 끌어냈고 나는 얼굴을 본 지 이틀밖에 안 되는 사람에게 가까운 친구와 가족에게도 하지 못한 얘기를 할 수 있었다. 내 말을 듣는 그의 태도는 마치 내가 굉장히 얘기를 잘하는 사람처럼 느끼게 해 주었다. 덕분에 신나서 한참을 떠들어댔다. 대화 소재 중에는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그 스토리를 누군가에게 자세히 말한 건 처음이었다. 상대는 감탄을 해주었는데 거기에는 아마 친절함이 많이 섞여있다고 생각한다. 돌이켜보면 내 얘기는 꽤나 두서없었으니 말이다.



 첫째 날은 맑았고 둘째 날부터 비가 왔다. 창가에 비치는 밝은 햇살은 눈부셨고 다락방 지붕 아래에서 비가 두드리는 소리는 청각을 자극했다. 거기에 공간 곳곳에 글을 남길 수 있는 장치들이 매력적이었다. 거기에는 묵다 간 사람들이 적어낸 기록이 담긴 작은 책과, 추천도서 목록, 마지막으로 받는 이가 없는 편지가 있었다.


 헤어진 여자친구에게 보내지 못했던 찌질하고 뒤끝 있는 편지 하나를 남기고 왔다. 그 공간에 묵을 수 있었던 행운에 그저 감사하다. 시간이 지난 후 그곳에 다시 갔을 때 들렀다 간 사람들이 남기고 간 기록이 궁금하다.




 월요일 7시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에 향했다. 수도권도 아닌 지방 공항에서 비행기를 탔건만 그 시각에도 사람은 북적였다. 아침 8시가 되어서 도착한 제주도는 뉴스에서 봤던 것 이상으로 사람들이 가득했다. 친구와 만나기로 한 오후 4시 즈음까지 혼자 시간을 보냈다. 그 와중에 찾은 모립이라는 한 카페에서 나름 차분하게 글을 쓸 수 있었는데 빈자리가 없어 8명까지 앉을 수 있는 기다란 목재 모서리 쪽에 앉았다. 나 말고도 그 테이블에는 두 명의 여자가 앉아 있었는데 셀카에 제법 진심이었다. 다양한 표정을 짓고 거리와 각도도 신경 써가면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그 사람들은 한 자리에서 30분 넘게 셀카만 찍었다. 같은 테이블에 앉았기에 나도 모르게 시선이 흘끗흘끗 갔는데 카메라에 어떻게 찍히는지에만 집중하는 모습을 다른 각도에서 보고 있자니 그 표정들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보고 있으면 꽤 재밌는 그 모습을 마냥 보고 있는 것도 실례일 것 같아서 나는 안경을 벗었다. 그리고 시선을 다시 모니터에만 고정했다. 시력이 0.1인 게 다행이었다. 봐야 할 것만 보고 나머지는 흐릿하게 볼 수 있으니.



 카페에서 나와 수제버거 하나로 점심을 때우자 친구가 차로 데리러 나왔다. 간단한 인사를 나누자마자 우리는 월요일임에도 제주도에 넘쳐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부터 했다. 한 달 살이에서 한적함을 바랐던 그 친구 역시 그 점이 아쉬운 것 같았다. 짐을 풀고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뒤 해변가를 달렸다. 해안선을 따라 5킬로를 채워 달린 후 근처에 있는 이자카야에서 한라산 소주를 토닉워터에 섞어 마시고, 집에 들어와 와인을 두 병이나 비웠다.

 

 술이 들어가서 그런지 대화는 세세한 부분까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그와 나는 음악 취향이 맞고, 내가 그가 사귄 친구들 중 제일 늦은 나이에 친해진 친구라는 걸 알았다. 신인류, 프롬, 권진아의 노래를 들었다. 즐거운 시간이었다.


커피 템플 in 제주


 다음 날 해장국을 먹은 뒤 공항 근처의 카페에 갔다. 그날의 날씨에 딱 들어맞는 야외 테이블에 앉아 각자가 가져온 책을 읽었다. 그는 아마 나에게 있어 같이 있을 때 가장 책이 잘 읽히는 친구라고 할 수 있겠다. 집중력이 안 좋아 30분만 책을 읽어도 이내 딴 짓을 하는데 그와 같이 있으면 한 시간은 후딱 지나간다. 두 시간쯤을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두 번째 숙소인 섭지코지로 가기 위해 버스정류장에 나를 내려준 뒤 그는 유유히 돌아갔다.


 버스에 앉아 어제 들었던 신인류 노래에 꽂혀 앨범 전체를 계속 반복해서 들었다. 특히 '그런 하늘'이란 노래가 그날의 분위기와 잘 어울려서 열 번은 넘게 들었다. 숙소까지 곧장 가는 버스가 없어서 제일 가까운 정류장에서 택시를 타기 위해 내렸다. 정류장 의자 끝에 앉아 하늘을 바라봤다. 정류장 지붕에 살짝 가려졌지만 적당한 구름에 적당한 푸른색이었다. 나는 안경을 벗었다. 흐린 시야 너머로 구름의 하얀색과 푸른 하늘의 색이 섞여있는 듯한 색의 조합은 마치 수채화 같았다. 하늘을 보는데 안경은 필요 없었다. 나는 그렇게 한동안 멍 때린 채 하늘만 바라봤다.



 어디에서 무얼 하든 가끔씩 이렇게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자, 그런 생각을 했다.


# 글을 삶의 중심에 놓고

 

 글은 지금까지 내 발목에 찬 모래주머니 같았다. 어디를 향해 걸어가든 그 무게가 내 발목을 휘감는다.  무게 덕분에 목적지로 향하는 발걸음에 집중하지 못 한다.


 아마도 대학교 졸업 즈음이었다. 번역 강의를 연달아 수강하면서 글을 쓰는 것에 대한 공포가 줄어들었다. 이내 즐거움이 커져갔다. 이전까지는 어떤 생각이나 이야기를 글로 표현했을 때 인풋-아웃풋이 원활하지 않아 문장은 잡스러워지고 내가 쓴 글이지만 나중에 읽으면 무슨 내용인지 잘 와닿지가 않았다. 그런 와중에 번역 강의를 수강하면서 다른 언어로 쓰인 글의 의미를 풀어내 독자에게 잘 와닿는 언어로 써내는 연습을 하면서 생각이 텍스트라는 매개체를 통해 언어로 표현하는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되어 글쓰기에 대한 공포가 줄어들었다. 그때의 기억이 좋아서 번역 강의를 연달아 수강했다. 전공학점 채우기도 바쁜 4학년 때 말이다. 그 이후 무언가 떠오르는 게 있으면 글로 남기려 하는 습관이 남았다.


 시작은 에세이였다. 그 다음은 영화 리뷰. 지금은 소설을 자주 쓴다. 소설을 쓰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를테면 어제 친구랑 했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고 하자. 그걸 그대로 남겨봤자 다른 사람에게는 와닿지 않는다. 그 말이 내게 의미가 있는 건 내 삶의 맥락이 그 말에 반응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 말 속에서 의미를 뽑아낸다. 그 뽑아낸 의미를 잘 전달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든다. 캐릭터와 배경, 거기에 짧은 서사를 더한다. 그런 식으로 하나의 이야기를 완성한다.


 경험 자체가 의미 있다고 생각할 때는 그 상황을 최대한 재현하기 위한 글을 쓴다. 하지만 자소서나 일기가 아니기에 필요한 부분은 맘대로 각색한다. 가을을 봄으로 한다든지, 상대가 했던 말을 내가 했던 말로 바꾼다든지. 그저 어떻게 하면 이야기를 통해 읽는이에게 와닿을 수 있는지에만 집중한다. 감사하게도 가끔 남겨준 리뷰 중에 공감 받았다라고 말할 때 강한 성취감을 느낀다.


 아무튼 근래의 내 삶은 온통 글의 영향 아래 있었다. 글이 잘 안 써져 짜증이 많아지는 바람에 여자 친구와 헤어졌고(물론 그게 헤어진 유일한 이유는 아니다), 이직처를 구할 때 나도 모르게 글 쓰는 시간이 없으면 어떡할까를 신경 쓰고 있고, 글이 잘 안 써지는 날에는 좋은 친구와 술 한 잔 하면서 대화를 나눠도 통 집중이 되질 않았다.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글로 통해 맺은 관계가 각별하게 느껴졌다.


 에잇 이럴 바엔 한 번 일상의 모든 것을 글에 집중해보자, 그런 생각을 5월 중순쯤 했고 미루던 퇴사 시기를 확정했다. 적어도 한 달, 길면 올 해 내내. 이런 삶의 방식을 한 번쯤 고수해보고 싶었다. 주위 사람들에게 공감받기 어려운 이유라 그런지 그냥 일을 쉬고 싶다, 혹은 개인적으로 작업할 게 있어서 집중하고 싶다는 말로 돌려 말하고 있다. 떳떳하지 못하다는 말을 들을 수 있겠지만 그저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내 결정에 대한 평가를 하는 게 싫을 뿐이다. 물론 가깝게 지내거나 글을 통해 친해진 친구들에겐 그대로 말했다. 삶에서 한 번쯤 글에 집중해보고 싶다고.


 이 결정의 끝에는 어떤 글이 남을까, 설렘과 불안함이 교차한다.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순간에 항상 그랬듯이.


 


5년 뒤에 가치 있는 물건으로 숙박비를 대신하는 북스테이. 첫, 다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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