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본래 소설을 다 읽고 작가의 말이나 옮긴이의 말 같은 건 읽지 않는 편입니다. 작가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은 온전히 작품에 녹여내야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으니까요. 책의 결말까지 다 읽고 작가의 말 같은 걸 읽으면 이야기와 저 사이에 있었던 교감이 방해 받는 느낌도 들었구요.
그렇지만 하나의 글의 도입부부터 결말까지 온전히 써낸 후에야 왜 그런 글을 남기는지, 지금은 이해가 갑니다. 역시나 사람은 상대방의 입장에 오롯이 처해봐야 그 입장을 이해할 수 있나봅니다. 소설이란 건 작가가 전하고 싶은 수많은 말 중 일부분을 이야기에 녹여낸 것에 불과하기에 작품을 마치고 나서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남은 것이죠. 너무 많은 메시지를 작품에 담는다고 해도 독자는 그걸 다 소화해낼 수 없으니까요. 저는 글쓰기를 요리에 비유하는 걸 좋아하는데 요리를 하다보면 재료를 다듬으면서 버려지는 부분들이 많죠. 지금부터 할 얘기는 어쩌면 된장찌개를 만들다 버려진 파뿌리 같은 걸지도 모르겠네요.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습니다. 이야기는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떤 사람이 만들어내는가 하는 이야기요. 설명하고 나니 재미 없는 소재군요. 다 읽으신 분들의 노고에 그저 고개가 숙여질 뿐입니다. 영화, 드라마, 소설, 뮤직비디오, 웹툰 등 누군가가 지은 이야기에 둘러쌓인 세상을 살아가지만 나이가 들어갈 수록 자신이 만들어가는 이야기가 빈약해짐을 느낍니다. 대입, 취업, 결혼 등 삶의 과정을 거치면서 나라는 존재는 회사에서는 직원가정에서는 아들, 남편, 아버지 같은 역할에 매몰되니까요.
그렇게 되면 어느 순간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읽는 것 역시 힘들어집니다. 흥미로운 소재나 화려한 볼거리의영화나 드라마 같은 건 그나마 괜찮지만 인간의 내면 묘사에 집중한 소설 같은 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되지요. 언젠가부터 같이 책 얘기를 즐겨하던 친구들로부터 '나는 더 이상 소설을 읽지 않는다'는 말을 쉬이 듣게 되었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였어요. 직장에 들어가고 1-2년 간 책은 거의 한 권도 읽지 않은 것 같아요. 일에 필요한 매뉴얼 말고 말이죠. 물론 글을 쓰지도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아직 '이야기를 쓰고 싶다'라는 열망은 제 안에서 사그라들지 않은 건지 다시 책을 읽고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독서모임을 만들고 서울에 있는 글쓰기 모임에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글을 다시 쓰기 시작하면서 제 일상은 생기를 되찾았어요.
한동안은 일을 하고 집에 돌아오면 무슨 이야기를 쓸까하는 잡념 투성이 삶을 살았습니다. 가끔씩 지루한 출근 길에 이대로 회사에 가지 않고 카페에 들어가 퇴근 시각까지 글을 쓸 수 있을까? 하는 상상을 하곤 했지만 회사를 그만둘 생각은 없었어요. 글로 생계를 유지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니까요. 구체적으로 말하면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제 옆에 앉아 있는 반려묘인 꿍꿍이의 사료값조차 벌 수 없으니까요.
그런 제가 글을 쓰기 위해 회사를 그만둔 건 작년 초에 있었던 일 때문입니다. 이야기 속 작가님처럼 혼자 자취하던 시절 여행을 가느라 집을 일주일 이상 비울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저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집을 비워두고 싶지 않았는데 하나는 키우던 물고기 때문이고 또 다른 이유는 집에 사람 냄새가 사라지길 바라지 않아서 였습니다. 오랜 시간 집을 돌아왔을 때 휑한 느낌이 싫었거든요. 그 때 카페에서 같이 알바하던 예대 영화과에 다니던 친구가 집을 대신 봐주겠다 했어요. 그 전까지 연락처를 교환하지도 않은 그리 가깝지 않은 관계였음에 말이에요. 돈되는 물건 하나 없이 책만 쌓여있는 자취방이었고 도벽은 없어 보이던 친구라 일주일 동안 방을 맡겼죠. 일주일이 지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제 공간에 남겨진 타인의 잔향에 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 경험을 소재로 글을 써 보고 싶었죠. 저는 주로 원노트라는 플랫폼에 글을 쓰는데 처음 작성한 날짜와 시각이 표시됩니다. 2016년 7월 27일 이네요. 오후 3시 24분.
처음에는 제대로 된 형태의 이야기도 아니었어요. 그저 기록에 가까웠죠. 그렇게 알음알음 쓰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마무리 짓고자 생각한 건 작년, 그러니까 2021년 1월 이었어요. 출근하고 한가한 시간을 보내던 어느날 저는 구글에 그 친구 이름을 검색해보았습니다. 정확히는 한예종에 다니던 친구였으니 '한예종 ㅇㅇㅇ' 이런 식으로요. 영화과를 나왔으니 졸업작품 같은 걸 볼 수 없나 하구요. 신기하게도 검색물 중 두 가지가 눈에 띄었어요. 영화는 볼 수 없었지만 한예종 졸업작품 리뷰를 전문으로 하는 블로그가 있더군요. 거기에는 '집에 사람 냄새가 사라지길 싫어하는 사람의 집을 대신 봐주는' 단편 영화를 소개하는 글이 있었어요. 나머지 하나는 과외 공고문 이었는데 한예종 입시 전문 과외더군요. 거기 쓰인 자기소개가 인상적이었습니다.
현재 글을 쓰며 언젠가는 저의 책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꿈을 갖고 있다
저는 운명같은 거창한 단어를 선호하지 않는 편입니다. 그래도 이건 삶에서 또 한 번 마주치기 힘든 재밌는 우연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같은 경험을 가지고 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만들어낸 결과물과 그가 글을 쓰는 삶을 살아간다는 사실은 저에게 강한 동기가 되었습니다. 지금 쓰고 있는 이야기의 끝을 제대로 내보자는. 물론 이 정도의 동기(충분히 놀라운 일입니다만 제 게으름은 상상 이상이랍니다)로 저에게서 게으름을 떼어낼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7월 마감인 문학동네 장편 소설 공모전에 공모하자는 계획을 세우고 6월 말에 퇴사, 7월에는 한 달 내내 삶의 모든 부분을 글에 집중하고 하나의 이야기를 완성해보고자 했어요. 그렇게 작년 말, 가까스로 완성한 원고를 마감일에 맞춰 출판사에 보냈습니다. 이래저래 빈틈이 많은 이야기였어요.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부끄러울 정도로.
그렇게 1년이 지났고 같은 공모전의 마감일이 다가왔어요. 저는 그 기간동안 작가 비슷한 생활을 하면서 다양한 글을 써왔고 1년 전에 제출한 글 역시 처음부터 다시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공모전 제출과 함께 제 주위의 글과 관련된 일을 하는 분, 글을 좋아하는 분, 그리고 제 글을 읽고 싶다 말해주신 분들에게 보여주기로요.
그런 연유에서 쓰인 사소한 이야기입니다. 부디 읽으신 분들이 시간 낭비였다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