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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binsoon Apr 19. 2017

사랑하는 게 이렇게 어렵습니다 여러분

<나의 사랑, 그리스>, 크리스토퍼 파파칼리아티스

※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같이 가기로 갔던 친구가 사정이 생겨 혼자 가게 되었다. 이상하게 다른 약속보다 영화 약속은 파투 날 때가 많았다. 헤어질 때 장소가 영화관인 적도 많았고. 머피의 법칙 비슷한 걸까. 다시 약속 잡기 귀찮아 그냥 혼자 갔고 지난번과는 다르게 시사회 표를 한 장만 받았다. 그 덕분인지 자리는 정 가운데로 배정받았다. 꽉꽉 들어찬 가운데 줄에 나 말고 혼자 앉은 사람이 있는 걸까 생각했다. 자리에 도착했을 때 내 쪽에 커피를 둔 여자가 내가 온 걸 보곤 자기 쪽으로 옮겼다. 밤에는 꽤 쌀쌀한데 짧은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여자들이 보통 실내에서 입는 남자 트렁크팬티 같은 바지. 반면 나는 모직 롱코트, 안에는 히트텍을 입고 있었다. 빠르게 지나가는 봄의 한가운데 여름과 겨울이 있었다.


 여담은 여기까


 그리스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세 가지 사랑 이야기. 이야기 속에는 폐비행기에서 생활하는 시리아의 난민 청년과 그리스 기업의 구조조정을 위해 방문한 스웨덴 여성, 그리고 강단에서 은퇴한 독일의 노교수라는 이방인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들을 맞이하는 그리스인들. 영문 제목인 'Worlds Apart'는 국적이 서로 다른 세 쌍의 커플들을 염두하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나의 사랑, 그리스>는 배신의 영화다.



# 타이틀의 배신


 <나의 사랑, 그리스>라는 국내용 타이틀이 붙기 전까지 이 영화는 <Worlds, Apart>라는 영문 제목을 갖고 있었다. <나의 사랑, 그리스>에서 느낀 인상은 <러브 액츄얼리>의 그리스 판 정도 일려나 생각했다. 그러나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인수기업의 구조조정 담당자로 온 여자와 구조조정 대상자인 남자의 꿈도 희망도 없어 보이는 사랑이야기에 그 기대는 가볍게 배신당했다. 노년의 사랑을 다룬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사랑을 넘어 삶의 통찰을 시도하는 전개에 초반부에 가졌던 단순한 감정에 복잡한 이성이 들어왔다. 독립된 서로 다른 세계를 잇는 과정인 사랑에서 각자의 세계는 분열되고 재구축의 시간을 가진다. 언뜻 보았을 때 고딕체 같은 가벼움은 자세히 보면 궁서체 투성이였다. 그러나 메시지를 강변하는 게 아닌, 이야기에 적절히 녹이는 방식으로 의미를 전달한다.


첫 번째 에피소드 <부메랑>
두 번째 에피소드 <로세프트 50mg>
세 번째 에피소드 <세컨드 찬스>


# 캐릭터의 배신


 캐릭터는 뜻밖의 사랑스러움을 품었고 영화는 '이래도 사랑하지 않을래'라고 말하듯 관객을 도발한다. 독일인 노교수인 세바스찬(J.K 시몬스)은 세컨드 찬스(세 째 에피소드의 타이틀이기도 하다)를 영어로 말하지만 그리스의 주부 마리아(마리아 카보이아니)는 영어를 거의 못한다. 그가 말하는 의미를 절반도 못 알아듣지만 멋대로 하는 공감은 어느새 상대에게 전해지고 혼잣말로 하는 그리스어에 진심을 담고 그중 절반을 영어로 표현한다. 서로에게 절반의 의미를 담은 말 밖에 할 수 없지만 거기에서 피어나는 사랑은 하나 이상이다. 캐릭터의 매력을 외형에 한정시키지 않고 연기와 대사, 표정으로 표현하고 연출로 돋보일 때 영화는 빛이 난다. 불만투성이 가정주부 마리아가 그리스어로 불만을 토로하듯 내뱉는 사랑 고백에서 사랑스러움을 느꼈다.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가벼운 불륜을 즐기는 듯한 조르지오(크리스토퍼 파파칼리아티스)가 삶의 성찰을 시도할 때 인간미를 느꼈다.


# 이야기(전개)의 배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여전히 힘들다. <러브 액츄얼리>가 여러 커플의 사랑이 발전하고 결실을 맺는 과정까지만 그렸다면 세 커플로 이야기를 한정한 이 영화는 발전한 관계의 갈등까지 포함했다. 그 갈등은 국적과 문화 차이(부메랑), 가치관의 차이(로세프트 50mg), 살아온 인생사의 차이(세컨드 찬스) 때문이다. 서로에 대한 끌림이 이 모든 걸 극복하리라 믿는 건 지나치게 낭만적이고 고전 멜로스럽다. 영화는 여기에 정치와 가족까지 끌고 왔다. 사람 사는 세상사가 복잡한 만큼 그들이 하는 사랑 역시 복잡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끝끝내 사랑을 해야 하는 당위를 제일 나이 들고 삶의 정력이 부족할 것 같은 노년 커플의 모습에서 발견하고 다시 사랑을 희망한다.

 



 2시간 러닝타임에 담은 3개의 에피소드는 캐릭터와 이야기 모두의 입체성을 살렸다. 모든 에피소드를 관통하는 '에로스와 프시케' 이야기를 통해 사랑에 관한 철학을 담았다. 독립적으로 느껴지는 세 에피소드를 후반부에 가족이라는 유대로 엮는 편집도 매끄럽다. 두 번 이상 봤을 때 새로운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영화를 보통 수작이라 한다.


 사랑을 망설이는 사람, 사랑에 지쳐있는 사람, 새로운 사랑을 꿈꾸는 사람 모두에게 권하는 영화다. 사랑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이 대사와 이야기 구성, 지나가는 배경의 구석에 담겨 있다.

 



 영화가 끝난 뒤 정류장으로 걸어가다 집에 가는 버스가 눈에 띄어 달렸다. 다행히 정류장에서 출발하려다 나를 본 기사 덕분에 버스는 다시 멈췄다.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폈다. 창밖을 바라보다 첫 번째 에피소드의 장면이 떠올랐다. 버스에서 창밖을 바라보면 여자를 발견한 남자가 버스에 타서 말을 거는 장면. 여자는 웃었고 장면이 전환되며 사랑이 시작되었다.
 성동구를 지날 때였나, 아까 옆에 앉은 여자가 버스에서 내렸다. 영화를 보는 내내 울고 웃고 공감할 때는 의자가 흔들릴 정도로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여러모로 리액션이 풍부한 여자였다. 버스 안에 그녀가 있는 줄 몰랐던 나는 순간 따라 내려서 말을 걸어 볼까 생각했다. 시사회, 혼영, 148번 버스, 겹쳐진 별 거 아닌 우연에 마음이 살랑거렸다. 봄이 와서 그런 걸까. 롱코트 차림의 나는 전혀 덥다고 안 느끼는데 반바지 차림의 그녀는 춥다고 느낄까? 대화의 시작으로 이런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좋은 영화로 마무리되는 하루를 좀 더 음미하고 싶은 마음에 정류장에 도착해 길을 헤매듯 산책을 했다. 봄꽃이 만개하고 있었다.  


※브런치 무피 패스 시사회에서 관람한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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