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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빈 Sep 06. 2017

논란의 역사 – 뮌헨 평화 협정

악마와도 협상을 할 것인가? 

1938년. 9월 유럽에는 전쟁의 분위기가 무르익어 갔다. 같은 해 3월에 오스트리아를 합병하는데 성공한 히틀러의 제3제국은 체코 슬로바키아의 수데텐 지역을 요구하면서 영국- 프랑스와 전쟁을 해서 승리할 자신이 있다고 선전하고 있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9월 23일 전국민 총 동원령을 내려 전쟁이 돌입할 준비를 하고 있었고, 프랑스도 동원령을 내렸다. 체코슬로바키아와 프랑스의 달라디에 내각과 전쟁에 대비한 조약을 맺었고, 소련의 스탈린도 체코슬로바키아와 협정을 통해 독일의 침략시 도움을 약속하고 있었다. 전쟁을 막기 위해 9월 15일부터 독일로 날라가 히틀러를 만나고 있던 영국 수상 네빌 체임벌린의 노력은 모두 수포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히틀러는 9월 22일 수데텐 지역에서 체코슬로바키아군의 전면 철수와 독일군 진주를 허가할 것을 요구했다. 히틀러의 요구의 근거는 1차 세계대전 이후 베르사이유 조약을 통해 원래 독일의 영토였던 수데텐 지역에 체코에 합병된 것을 원래로 돌려달라는 것이었고, 수데텐 지역에 거주하는 인구의 70% 이상이 독일인이였기에 아주 비 논리적인 것은 아니라고 여겨지기도 했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에 대한 준비가 거의 되어있지를 못했고, 1936년 재 무장을 선언한 독일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것에 대해 상당히 위험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당사자인 체코슬로바키아로써는 수데텐을 독일에 내어주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로, 수데텐이 당시 유럽 최고의 공업국가로 떠오르던 체코슬로바키아의 최대 공업 지역이기 때문이었다.

영국 수상 네빌 체임벌린이 뮌헨 협상을 마치고 영국에 돌아와서 협상서를 군중에게 내어 보이며 협상의 성공을 선포하고 있다. 이때 한 연설이 "우리 시대의 평화를 위하여"이다.

 

하지만 영국, 프랑스, 독일을 비롯한 모든 국가의 국민들과 여론은 절대 전쟁을 원하지 않고 있었다. 특히 1차 세계 대전을 겪으면서 엄청난 인명 피해와 경제적 피해를 입었던 독일과 프랑스 국민은 또 다른 전쟁이 발발하게 될 경우 발생하게 될 상황에 대해 상상조차 거부하고 있었다. 영국 역시 여론은 전쟁을 반대했다. 이런 압력속에서 영국의 수상인 네빌 체임벌린은 전쟁을 막기위한 최후의 협상을 히틀러와 진행하고 있었고, 전쟁이 코 앞에 다가온 상황에서 결국 합의를 이끌어 냈다. 바로 “수데텐 지역에서 체코슬로바키아 군대가 철수하고 이 지역을 독일에 합병하는데 합의하며, 이를 통해 영국, 프랑스, 독일이 전쟁을 하지 않는다.”라는 뮌헨 협약이 그것이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동맹국인 프랑스와 영국에게 버림을 받았다며 반발했고, 소련의 스탈린은 영국과 프랑스가 자신의 동의없이 체코를 포기한것에 실망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였고, 혼자 힘으로 독일에 맞설수 없었던 체코슬로바키아는 수데텐을 독일에 넘겨주었다. 협정을 맺은 네빌 체임벌린이 영국에 돌아오자 엄청난 군중이 그를 환영했고, 그는 유럽에서 전쟁의 위기를 막아낸 영웅으로 추앙 받았다. 이 환영 행사 자리에서 체임벌린의 유명한 연설인 [우리 시대의 평화 Peace in our time]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역사는 네빌 체임벌린의 편이 아니었던 것 같다. 우리가 모두 알 듯 체임벌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뮌헨 회담은 6개월뒤 파기되었고, 독일은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해버렸다. 그리고 39년 폴란드를 침공하여 이를 점령하고 얼마 뒤 소련과 스위스, 그리고 영국을 제외한 모든 국가가 히틀러의 제 3제국의 깃발아래 무릎을 꿇게 된다. 1931년의 대공황의 위기에서 무너지는 영국 경제를 구출하여 국가적 영웅에 떠올랐고, 38년 전 유럽을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던 위대한 정치가는 결국 불명예스럽게 수상직을 물러나고 영국 정치계에서 가장 호전적이라 평가 받던 윈스턴 처칠이 그의 뒤를 이어 수상을 맡게 된다. 과연 체임벌린의 결정은 잘못된 것이었을까? 그렇다면 그는 왜 그런 결정을 내렸을까? 체임벌린은 뛰어난 정치가였고, 협상가이며, 기업인이었다. 그는 언제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직접 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문제가 발생하면 언제나 앞장설 수 있는 인물이였다. 그는 전형적인 영국 신사이자, 도덕적인 기업인이고, 정치가였다. 하지만 이런 그는 여러가지 잘못된 심리학적인 오류에 빠져 잘못된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뮌헨 협상의 합의안의 원본 사진. 맨 오른쪽 끝에 네빌 체임벌린의 사인이 보인다.



체임벌린이 뮌헨 회담당시 빠져있던 심리학적인 오류는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확증 편향 증상과 손실 회피 증상이다. 뮌헨 회담을 진행하던 당시 체임벌린과 프랑스의 달라이에 수상은 한가지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바로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을 치를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였다. 특히 체임벌린은 31년 미국의 대 공황이후 영국 정부의 긴축 정책을 주도하면서 가장 강력하게 군축을 시행한 인물로 영국군의 준비 상태가 미흡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뮌헨 회담을 진행하기 이전 그는 정확한 영국의 군사력과 독일의 군사력에 대한 정보를 확보하지 못했고, 히틀러와 독일이 선전으로 내놓는 군사력에 대해 막연한 공포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와 같은 체임벌린의 자국 군사력에 대한 자신감의 결여는 무조건적인 전쟁 회피만이 최선의 길이란 그의 확신을 강화하게 되었다.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 소련과 체코슬로바키아의 군사력으로 독일을 사실상 제압하는것이 가능했고, 히틀러 역시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히틀러는 체임벌린이 자신의 군사력에 자신감이 없고, 전쟁을 회피하는것만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믿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기에 뮌헨 회담을 자신의 원하는 결과로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여기에 체임벌린이 빠져 있던 손실 회피는 그가 가지고 있던 1차 세계 대전에 대한 기억을 바탕으로 전쟁 – 손실-을 회피하기 위해 일정 수준의 손해도 감수하는 행동을 보여준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심리학이 아닌 협상론으로 볼 때에도 체임벌린은 지나치게 문제 해결에 집중하는 Problem Solving Strategy에 집중한 결과 자신이 가지고 있는 협상 카드를 히틀러에게 협상 초기에 모두 공개함으로써 히틀러의 협상 전술 – Competitive Strategy에 이용 당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협상을 할 때 상대방의 협상 전술과 성향을 파악하지 않고 문제 해결에 지나치게 집중하게 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오류에 빠진 것이고, 협상 전체를 준비 과정에서도 충분한 검토와 전략없이 협상에 임해 오류에 빠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역사는 언제나 결과로 평가 된다. 만일 히틀러가 체임벌린을 이용하지 않고 전쟁이 아닌 평화의 길을 택했다면 체임벌린의 뮌헨 회담은 그에게 영광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히틀러가 그러지 않았기에 체임벌린의 뮌헨 회담은 역사상 최악의 외교 협상으로 기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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