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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칼두 Aug 16. 2020

시체놀이


자살하기로 결심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일이 딱히 있는 건 아니었다. 무난한 직업에, 적당한 돈, 적당한 차에, 적당한 집까지. 적당한 친구들, 적당한 평판. 나의 삶은 적당히 살기에 적당했다. 


반면에 계속 살아 갈 이유도 굳이 없었다. 그렇게 삶을 행복하게 하는 것도 없었으며, 매일 매일 사는게 즐겁지도 않았다. 무난한 삶 속의 권태는 삶의 원동력이 전혀 되지 못했으며, ‘무엇을 해야하는가’에 대한 답변을 주지 못했다. 남들 눈에 그럴싸해 보이는 절친한 친구들은 사실, 별로 마음을 주는 사이가 아니었다. 우리는 평생 갈 친구들이라고 입으로는 떠들어댔지만, 그들에게 진짜 관심을 준 게, 진심으로 걱정을 해준 게 언제였는지 기억이 흐릿했다. 분명 친했다는 점은 명확했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해왔다. 그들과의 추억은 내 세계관을 형성하는데 기여했다. 하지만 의심스럽다. 그 추억을 볼모로, 우리의 인연의 실은 이미 끊어졌는데 억지로 엮어가고 있는게 아닌지. 남들처럼 적당한 친구들이 있다는게, 평균적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걸 방증하는 것처럼, 그 평균적 삶을 위해 억지로 이어가고 있는게 아닌지. 이젠 그 실을 엮을 의지마저 없었다. 


그런 생각이 두드러지게 나는 곳은 술자리였다. 술자리에서 끊임없이 서로의 이야기를 나눈다. 이야기를 하는게 신이 나서, 그들에게 내 이야기를 들려주기 원해서는 아니었다. 그저 이 침묵이 무서워서, 우리들의 관계가 언제든지 붕괴될 가능성이 농후한 부실한 건축물과 같다는 사실을 인지하기 싫어서였다. 침묵이 두려웠다. 그래서 이야길 끊임없니 나눴다. 그 이야긴 보통 여자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여자들은 늘 우리의 곁을 떠난, 혹은 애초에 있지도 않았지만 착각했던, 여자에 대한 이야기였다. 누군가에겐 평생 잊지 못할 한 여자의 이야기, 누군가에게는 평생을 고독하게 사랑하게 될 한 여자의 이야기가, 그런 이야기는 술자리의 소재를 전락해버렸다. 나는, 우리는, 그 사랑에 대해 진심으로 관심이 있는게 아니었다. 침묵을 묵살할, 술자리의 안주로 쓰면 그만인 그런 사랑이었다. 


술자리의 안주로 쓰일 걸 뻔히 알았기에, 나는 그들에게 진심을 말하지 못했다. 그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녀를 얼마나 잊지 못할지를. 아직도 못 잊었냐면서, 또 다시 건배를 외칠 우리의 모습이 보이기에. 여전히 술안주 신세를 면지 못할 내 사랑의 모습이 뻔히 보였기에. 


그런 사이였기에, 우리의 사이는 그랬다. 모든 인간들이 시각이 없다면, 아무도 우리를 보지 못한다면, 볼 관객이 없기에 만날 이유가 없는, 그런 사이였다. 


서글펐던 건, 이들 이외에는 딱히 친한 친구라고 부를만한 사람이 없다는 점이었다. 이들마저 없었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코스프레로 보여줄 친구들마저도 없었다. 불편한 연극보다도 더 나은 관계가 없다는 건 나를 서글프게 했다. 


또,

누군가에게는 우리 사이가 정말 친구처럼 보였을지 궁금했다. 정말로 그 사람은 우리가 진짜 친한 친구로 생각했을까. 아니면 그 누군가도 본인의 친구들이 코스프레라는 생각으로, 우리가 하고 있는 이 연극을 이미 연극으로 여기고 있을까. 궁금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모두 연극 속의 관계에서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막상 까보면 눈에 보이는 것과는 다른 생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밖에 없는 그런 연극 속에서. 


그 생각을 하니 역겨움이 느껴졌다. 모든 사람들이 그런 가식과 역겨움 속에서 살아간다면, 이 세계는 하수구와 다를 바가 없었다. 시체의 역함이 나는 매립지였다. 


더 역겨웠던 사실은 그 역겨움이 나에게서도 이미 난다는 점이었다. 나는 이 역겨움에서 벗어날 수 없는 노예였다. 내가 세상 끝을 향해 달려간다고 해도, 이 역겨움은 나와 함께 세상을 끝을 도달할, 그런 역겨움이었다. 

그런 이유로 자살을 결심했다. 


역겨움에서 벗어날 방법은 죽음뿐이었다. 아쉽게도 병으로 죽기엔 건강한 편이었다. 언론에서 접하는 수많은 자살 기사들. 그 자살 기사들을 접할 때마다 드는 생각은 미련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었다. 누가 뭐라고 하든 그렇다. 나에게 진정한 자살은. 자살 할 필요가 없을 때 하는 자살이라고 생각했다. 돈이 없어서,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어서 하는 자살, 그런 자살은 진정한 자살이 아니었다. 그들은 도망자였다. 

진정한 자살은 자살을 할 필요가 없을 때 하는 자살. 남들 눈에는 전혀 자살할 이유가 없어 보이는 사람이, 삶에 대한 만족을 멈추고, 더 이상 살 이유가 없다, 어차피 앞으로 다가올 삶도, 지금의 삶과 다르지 않다는 진단을 내리고, 행하는 자살이 진정하는 자살이라고 생각했다. 


수 많은 철학자들이 숭배해왔던 그 자살. 

나는 그런 이유로 자살을 결심했다. 앞으로 다가올 삶이 지금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기에. 

자살을 하기 위해선 방법을 택해야 했다. 연탄을 피는 것, 목을 매는 것, 농약을 먹는 것, 옥상에서 추락하는 것, 드물긴 하지만, 권총자살까지. 

다양한 자살방법이 있었다. 자살 방법을 결정하는 것은 중요했다. 자살을 하는 이유는 삶보다 죽음이 낫기 때문이 아니었다. 삶이 0이기에, 죽음과 별 차이가 없다고 본 탁이었다. 그렇다면 고통을 최소화하는 자살 방법을 선택해야 했다. 죽음 자체보다 죽음을 향해 가는 과정이 고통스럽기에,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가장 클래식한 방법으로 자살을 하기로 결심했다. 클래식에는 이유가 있다. 다양한 청바지 브랜드가 등장해왔지만, 결국 청바지를 좋아하는 사람은 리바이스 청바지로 돌아가는 것처럼. 

목을 매기로 한다. 죽음을 준비한다. 


우선 목을 매기 위해선 줄이 필요했다. 집에는 목을 매기에 충분한 긴 줄이 없었다. 근처에 가까운 철물점에 간다. 무엇을 찾으시나요라는 질문에 목을 맬 줄이 필요해요라고 답하진 못한다. 그저 길고 튼튼한 줄을 찾고 있다고 말한다. 철물점 아저씨가 추천해주는 줄을 사들고 집을 향해 간다. 집을 향해 가는 길에 포장마차가 눈에 띈다. 포장마차에는 낯익은 음식들이 즐비했다. 떡볶이, 튀김, 순대, 오뎅, 왜 이리 맛있어 보이는지 모르겠다. 각자 3000원 씩, 포장해갔다. 죽기 전에 먹고 죽자고. 


맛있었다. 죽기 전에 먹은 음식 치곤 맛있었다. 물론 그런 적은 없었지만. 이제 죽음을 맞이한다. 이 지루한 세계와의 투쟁에서 벗어나게 해줄 나의 죽음을 맞이하자. 목줄을 잡는다. 머리는 줄을 향해 간다. 그때 휴대폰이 울린다. 죽음을 향해 가는 내 발걸음을 멈춘다. 


친한 친구가 죽었다는 문자였다. 

충격이었을 것이다.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에 온 문자가 아니라면, 다른 사람의 시선을 생각해야 하는 상태였다면, 충격을 받은 척 해야했다. 어차피 나도 죽을 운명인데 나보다 조금 더 빨리 죽는다고 충격일게 있는가. 하지만 곰곰이 생각한다. 어차피 이 권태의 삶은 반복이다. 그 이야기는 죽음은 지금이 아니라, 조금 미뤄도 된다는 이야기였다. 달라질 것은 없기에. 죽음을 잠시 미룬다고 삶이 달라진다면, 그건 권태가 아니었다. 자살할 필요가 없었다는 걸 의미한다. 


죽음을 잠시 유예하고 장례식을 간다. 


장례식엔 이미 익숙한 사람들이 있었다. 친한 친구라 부르는 사람. 아는 사람이라 부르는 사람. 낯선 사람이라 부르는 사람. 그들을 장례식에서 만나는건 묘하다. 반가운 척을 굳이 안해도 됐으므로 편하기도 했다. 반가운 척을 굳이 하지 않아도, 친구의 죽음에 슬퍼하는 것처럼 보였기에, 이상하지 않았기에. 


육개장을 먹는다. 잘 끓인 육개장이다. 누군가를 앞에 두고 밥을 먹는다는 건 늘 불편하다. 특히 장례식장처럼 밀접한 공간은 더욱 그렇다. 죽음이라는 공통된 소재를 가지고 옹기종기 모여 죽음을 논한다. 입에 들어가는 건 육개장이 아니라 죽음일지도 모른다. 이미 죽음을 논하기에 우리 입에 들어가는게 죽음인지도 모른다. 장례식장에서 육개장의 맛을 음미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이봐

낯익은 목소리가 들린다. 죽은 친구와 함께 친했던 친구중 하나였다. 굳이 설명하자면, 다른 이들의 눈엔 절친한 친구들 중 하나가 맞다. 아직 듣지 못했지만, 아마도 죽은 친구의 관을 함께 들어야 할 지도 모르겠다.

낯익은 목소리를 가진 남자는 나를 이끌고 구석진 자리로 이끈다. 그리고 늘 그렇듯이 소주를 먹는다. 

저 친구 왜 죽었는지 알아? 


죽음의 방식에는 관심이 없었다. 죽음 자체에 관심이 있을 뿐. 죽음이 도달하는 순간, 어떻게 죽었는지는 의미가 없었다. 오히려 죽음의 방식보다는, 그 사람의 삶의 방식이 더 궁금해진다. 어떤 사람이었는지.

다름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얼마나 돈을 벌었는지, 어떤 병을 앓고 있었는지, 여자친구는 있었는지, 얼마나 돈을 남겼는지, 그 돈이 누구에게 가는지, 그 돈이 누구에게 얼마나 가는지. 여자친구에게도 그 돈이 가는지.


그런 것에 관심이 있었다.

어떤 죽음을 했는지는 관심이 없다. 단지 관심 있는 척 할뿐이다. 내 앞에 있는 이도 그 부류였다. 오히려 죽음을 소재 삼아 나와 이야기를 나눌 뿐이었다. 그게 죽음의 방식에 대한 유일한 유용성이다. 

이런 부류의 대화를 많이 봐왔다. 진짜 관심 있는 것, 진짜 좋아하는 것은 함부로 입에 오르지 않는다. 함부로 입에 올렸다가, 진짜로 좋아했던 것이 손상될까봐, 진짜로 좋아했던 그 마음마저 간직하지 못할까봐,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 


우리의 우정이 코스프레에 불과했다는 걸 다시 확신한다.


아니 어떻게 죽었는데?


친구가 원했을 반응을 기꺼이 해준다. 그게 서로를 위해 편했으므로.


자살했대. 너는 예상했어?


충격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예상하진 않았다. 다른사람이 자살을 예상할 수 있는 사람은 자살을 할 필요가 없다. 이미 죽은 것과 마찬가지이기에. 자살은 어떤 이미지인가. 실패한 존재이다. 삶이 무너져버린, 혹은 사회와의 관계가 단절된, 그런 이미지였다. 


그런데 이미 자살을 예상했다는 건, 예측 가능했다는 건, 이미 무너져버린 존재로 각인된 상태라는 것이다. 타자의 시선은 지옥이다. 그래서 자살을 예측할 수 있었다면, 그 자살을 막을 수 있다고 해도, 죽지 않았다고 해도, 그 사람은 살아있는게 아니다. 그런 면에서 죽은 친구의 자살은 성공적이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우리는 말 없이 술을 마신다. 육개장 한 숟갈, 전 한조각, 죽음을 안주 삼아.

우리의 이야기는 과거의 반복이다. 과거의 이야기를 계속 이야기 한다. 이 생산은 무의미하다. 오히려 말하면서 흐릿해진다는 점에서, 왜곡된다는 점에서, 손해라고 볼 수 있다. 차라리 추억으로, 머릿속 저편으로 갖고만 있었다면 참 좋았을텐데. 


친구는 끝내 운다. 울음을 터뜨린다. 장례식은 울음이 허용되는 공간이다. 이 공간에서의 울음은, 창녀 앞에서 뻘거벗은 남자가 용인되는 것처럼, 허용되고 잊혀진다. 


미안하다 친구야. 진작에 알았어야 했는데.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지 그랬니 친구야. 

첫 구절과 마지막 구절은 순서가 바뀌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힘들다고 말할 친구가 있었다면, 죽지 않았겠지. 그리고 힘들다고 말하고 막을 수 있는 죽음이었다면, 진작에 막았겠지.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하나였다. 


넌 아무 잘못 없어. 


의도가 어땠든 해줄 수 있는 말은 하나였다. 그 말을 들은 친구는 더 펑펑운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넌 진짜 친구야 


곧 친구는 장례식장의 고요함을 담당하게 된다. 장례식장은 고요해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술을 계속 마신다. 마실 이유는 없었지만, 굳이 안 마실 이유도 없었다. 그의 죽음을 슬퍼할 이유는 없었지만, 굳이 슬퍼하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한 여자가 앞에 앉는다. 


술 혼자 마시는거에요? 


네. 

그럼 우리 같이 마셔요.

 

여자는 잔을 내빈다.


그렇게 몇 잔을 마신다. 서로 아무 말 없이 술을 마신다. 죽음을 논하기엔, 죽음은 너무 뻔한 맛이었기에. 굳이 죽음을 안주 삼고 싶진 않았다. 차라리 침묵이 더 맛있었다. 


죽은 사람이랑 아는 사이었나봐요 


여자가 먼저 말을 시작한다. 


제 친한 친구였어요 


아 죄송해요 


여자는 미안해하는 표정을 짓는다. 


뭐가 죄송하세요 


이런 말하면 실례인줄 아는데 친한 친구가 아닌 줄 알았어요. 그렇게 슬퍼보이진 않아서요 


그게 맞을 수도 있어요. 실례지만 전 슬프진 않거든요.


왜 슬프지 않은지 말해주실 수 있으세요? 


음 


나는 잠시 말을 머금는다. 


제가 친구한테 별로 관심이 없었거든요. 왜 관심이 없었냐고 물어보면, 그건 잘 모르겠네요 


그럴 수도 있죠 뭐. 


실례지만 혹시 친구랑 어떤 관계세요 


저는 죽은 사람이랑 사귀던 사이에요.

 

여자의 얼굴을 바라본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혹시 저번에 우리 본 적 있지 않나요? 


아 맞아요. 몇 달 전에 친구랑 같이 술먹지 않았나요. 


그랬던 것 같네요. 오랜만이네요. 이런 자리에서 다시 보게 돼서 유감이에요. 


뭐 어쩔 수 있나요. 우리 같은 사이가 다시 볼 수 있는게 결혼식 아니면 장례식 아닐까요. 


틀린 이야기는 아니네요. 남자친구가 죽었는데 안 슬퍼요? 


저도 참 그래요 살아있을때는 나름대로 좋아했다고 생각했는데 죽고나니 잘 모르겠어요. 의심스러워요. 내가 진짜 사랑했는지. 우리의 관계가 사랑이라고 부를만한 거였는지. 아니면 원래 사랑이라는게 이렇게 덧없는 거였는지. 


어떤 남자친구였어요? 


남들 보기에 좋은 남자친구였어요. 늘 다정했고, 이벤트도 해주고, 연락도 자주하고, 근데 잘 모르겠어요. 자괴감이 들어요. 다른 사람들처럼 화장 지워지도록 펑펑울고, 나도 따라가야지 하면서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하는지. 


그럴 필요 없어요. 마음 가는대로 하는거죠.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아무한테도 그렇게 말 못했거든요. 사실 친구의 죽음이 슬프지 않다고 말해줘서 마음이 놓였어요. 항상 그렇잖아요. 죽음은 늘 슬퍼해야 하는겆갆아요. 울거나 침묵하거나. 둘중 하나뿐이잖아요. 


저도 그랬어요. 슬프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아무한테도 슬프지 않다고 말 못해요. 당신한테 말할 수 있는 모르는 사람이어서 그랬던 거 같아요. 


전 친구의 여자친구였는 걸요. 


여자가 씩 웃었다. 


아 그러게요. 죄송해요. 친구한테 관심이 없었나봐요. 제가 실례되는 말을 한거 같아요. 


아니에요 우리 그냥 서로한테 실례하기로 해요. 마음이 편해지는데요. 이러면 안되는데. 


고마워요. 그렇게 말해줘서. 


우리 다음에 술 한잔해요. 


그래요 


여자와 연락처를 주고받고 떠난다. 


집에 들어가니 밧줄이 고스라니 기다린다. 


묶인 밧줄을 싹뚝 자르고 잠을 청한다. 


그 여자한테 문자가 온다. 


잘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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