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에 초상화만 그리다가 디지털 그림으로 넘어오게 된 계기는 덕질 때문이었다. 2023년 1월에 “더 퍼스트 슬램덩크”라는 극장판 애니메이션이 개봉되었다. 당시 나는 개인적인 일 때문에 굉장히 시무룩해져 있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몸이 같이 아픈 성향 때문에 며칠 앓아누웠었다. 기력이 없어 침대에서 나오지 못하던 나는 불현듯 영화관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신히 손가락을 움직여 인터넷에 볼만한 영화를 검색했다. 아바타2와 슬램덩크가 재밌다는 리뷰를 보았다. 하루에 그 두 개를 다 보기로 결심하고 비적비적 일어나 영화관에 갔다. 상영 시간표를 보니 슬램덩크를 본 뒤에 아바타2를 보면 적당할 것 같았다.
초반 이야기가 진행될 때는 누가 누군지 구분을 못 했다. 슬램덩크 원작을 몇 년 전에 1권과 마지막 권 밖에 보지 않았던 데다가 그나마도 내용을 잊어버렸었다. 강백호가 주인공이라는 것만 알고 서태웅이 누군지도 헷갈렸다. 극장판의 주인공이었던 송태섭은 당연히 알 리가 없었다. 정대만은 머리 긴 상태와 짧은 상태가 다른 사람인 줄 알았다.
그래도 재밌었다. 농구 규칙도 제대로 모르고 봤는데도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OST도 좋았고 실제 농구 경기를 보는 듯이 생생했다. 가장 좋았던 건 등장인물들이 농구를 사랑하는 마음이 느껴졌던 점이다.
여운에 잠겨 상영관을 나왔다. 예매해 둔 아바타2를 취소하고 슬램덩크를 하나 더 예매했다. 처음에 일본판을 봤었는데 서태웅 성우의 낮은 목소리가 너무 좋았다. 서태웅의 대사가 별로 없어서 아쉬웠다. 한 번 더 듣고 싶었다.
연속해서 두 번을 보고 저녁이 되어서 집에 돌아왔다. 펜과 마카로 강백호의 초상화를 그려봤는데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극장에서 본 것 같은 멋진 그림체로 그리고 싶었다. 그러려면 디지털 그림을 그리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아이패드는 프로크리에이트!
아이패드 프로를 갖고 있었지만 사실상 이북 리더기로만 쓰고 있었는데 드디어 쓸모를 찾았다. 인터넷에 아이패드로 그림 그리는 법에 대해 검색했다. 포토샵도 있지만 ‘프로크리에이트’라는 앱을 많이 쓴다고 했다. 더 다루기 쉬운 편이고 사용이 편리하다고 했다. 무엇보다도 월간 구독료를 낼 필요가 없고 한 번 결제하면 영구적으로 쓸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고민 없이 바로 결제하고 다운 받았다. 대강 검색해서 처음에 파일 생성하는 방법만 알고 무작정 작업을 시작했다. 포기를 모르는 남자 정대만이 그리고 싶었다. 아래 그림이 처음으로 작업했던 결과물이다. 아마도 모작으로 기억한다. 나름 명암도 넣어보려고 하고 그랬는데… ‘내가 이렇게 못 그리나?’ 싶을 정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 아이패드로 처음 그려본 그림
그림을 조금 그리다 보니 프로크리에이트 기능에 대해 알아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모르는 게 수시로 튀어나왔다. 레이어 여러 개를 한꺼번에 옮기는 방법이라든가 배경색을 지정하는 법이라든가 도형을 깔끔하게 그리는 법이라든가…. 처음에는 그때그때 생긴 궁금한 점들을 블로그나 유튜브에 검색했었다. 근데 용어를 몰라서 검색을 제대로 못 하기도 하고 여러모로 검색 능력이 부족한 것 같아서 체계적인 메뉴얼이 있으면 좋겠다 싶었다.
교보문고 사이트에 프로크리에이트라고 검색했더니 수많은 책이 나왔다. 대부분의 책이 ‘~하는 아이패드 드로잉 with 프로크리에이트’라는 제목이었다. 내가 원하는 캐릭터 일러스트를 다루는 책은 찾기 힘들었다. 보통은 일상생활에서 볼 수 있는 물건이나 풍경, 동물 같은 걸 그리는 법이나 이모티콘 그리는 법을 다뤘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다른 마음에 드는 책을 찾아 마우스 휠을 계속 움직였다. 실망스레 검색 결과를 쭉쭉 보던 중 ‘프로크리에이트 작법서’라는 책을 발견했다. 제목부터 메뉴얼의 향기가 났다. 목차를 보니 딱 내가 원하던 내용이었다.
밀리의 서재에 검색해 보니까 있어서 바로 대여했다. 어차피 이론만 읽어봤자 머리에 안 남으니까 전체 정독하지는 않았다. 그때그때 필요할 때마다 사전 찾듯이 뒤적거리면서 봤다.
▼프로크리에이트 작법서의 목차 화면
그림은 그리고 싶을 때만 찔끔 그렸다. 이상이 높아서 머릿속의 나는 쉴새 없이 그림을 그리면서 노력하고 있었는데 실제로는 머쓱할 정도로 별로 안 그렸었다. 글을 쓰면서 자료로 첨부할만한 작업물들을 찾는데 적당한 걸 고르고 자시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작업량이 적었다.
▼3월에 그린 그림
지망생과의 만남
4월에 오픈톡을 뒤적거리다가 내가 사는 지방 소도시의 웹툰 작가 지망생 모임이 있어서 들어갔다. 당시에는 웹툰에 크게 관심이 있던 건 아니었지만 디지털 그림을 주제로 한 오픈톡이 없어서 들어갔다. 워낙 작은 소도시라 그런지 나까지 3명 밖에 없었다. 방은 대체로 조용했다.
들어간 지 일주일 정도 됐을 때 방장이 카페에서 만나서 같이 그림 그리는 건 어떻냐는 제안을 했다. 마침 시간이 되기도 했고 창작하는 사람들과의 교류에 목말랐어서 냉큼 가겠다고 했다. 다른 한 명은 시간이 안 돼서 못 와서 방장이랑 둘이 만났다.
그는 웹툰 관련 학과를 졸업하고 공모전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내가 디지털 그림에 입문한 지 두 달 됐고 노력의 방향성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니까 선발대로서 이런저런 조언을 해줬다.
모작이 실력을 빨리 많이 늘리는 데 도움이 된다고 모작을 많이 하라고 했다. 그러다가 내가 슬램덩크를 좋아하니까 내친김에 자신과 함께 지금 슬램덩크 캐릭터 모작을 해보자고 했다. 방장은 강백호를, 나는 녹초가 된 정대만을 그렸다.
▼그날 한 모작
그려보고 나니 형태감과 비율을 잡고 그대로 그리는 게 잘 안됐다. 원본 그림이 있는데 내가 생각하는 위치에 내가 생각하는 선을 그리게 되니까 똑같은 컷을 따라 그린 건데도 결과적으론 다른 결과물이 나왔다.
방장은 딱 봐도 원본과는 천지 차이인 내 그림을 보고, 모작은 생각하면서 해야 한다고 했다. 예를 들어 위 그림의 빨간 선을 보면 원본은 귀 끝과 눈썹 끝이 같은 선상에서 만나는데 내가 한 모작은 귀의 중간과 만난다.
똑같이 그리기 위해 아무 생각 없이 겉만 보고 따라 그리던 내게 그는 부분 부분을 이용해 위치 잡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그렇게 할 생각을 전혀 못 했었기 때문에 새롭게 깨우친 기분이었다. 혼자서 그리다가 즉각적으로 피드백과 격려를 받으니까 너무 좋았다.
모작하기 전에 대화하다가 크로키 얘기가 나왔었다. 크로키도 매일 꾸준히 많이 하면 좋다고. 마침 창작 메이트를 만난다고 신나서 그동안 했던 크로키 노트들을 주섬주섬 들고 왔었기에 그걸 보여줬다.
비율 같은 걸 전혀 모른 채 겉만 따라 하는데 급급한 크로키였지만, 방장은 그게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나중에 헤어질 때쯤에 이런 말을 했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만 하고 행동을 안 한다고. 내가 말로만 하고 빈둥거리는 사람이었으면 솔직히 아무것도 안 가르쳐줬을 텐데 잘하고 있다고.
칭찬과 관심, 격려에 목말랐던 내 안의 황태산이 그 말에 날뛰었었다. (*황태산의 유명한 대사: 좀 더 칭찬해라. 좀 더 환호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