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더 많은 사람이 내 그림을 보고 웃으면 좋겠어
한참 그림 그리는데 재미 들였을 때 가방에 펜과 종이, 36색 오일파스텔을 바리바리 넣고 다녔다. 언제든지 그릴 수 있으려면 준비가 철저해야 했다.
한 번은 서울에서 돌아오는 길에 KTX를 탔는데 대각선으로 앞자리에 외국인 두 명이 탔다. 원래는 엽서를 주고 싶었는데 하필 집에 다 놓고 온 날이라서 어쩔 수 없이 즉석에서 그리기로 했다. 다행히 내가 먼저 내렸다. 그들이 영국인이기를 바라면서 종이 뒷면에 인스타 주소를 써서 주고 내렸다. 근데 정말로 연락이 왔었다.
안타깝게도 자신은 독일인이라고 해서 메르켈을 그려줬다. 내 짧은 영어와 노잼 독일인이 콜라보를 이뤄 연락은 금방 끊겼다.
▼ 기차에서 그렸던 보리스 존슨 초상화
당근에서도 초상화를 그려준다고 한 적이 있었다. 신청자 한 명이 매형과 어린 조카 2명을 찍은 사진을 보냈다. 못생기게밖에 못 그려서 아기는 안 받는다고 설명에 써놓았었는데 신청자가 인터넷 사이트에서 내가 올린 그림을 봤다고 해서 그냥 그리기로 했다.
▼ 당근에서 그려준 초상화
실물 그림도 받고 싶다고 해서 택배로도 보내줬다. 신청자는 고맙다고 바나나우유 한 개와 베이글+아메리카노 세트 기프티콘을 주었다. 그리고 누나에게 그림을 보여준 후기 카톡도 보내줬다.
고소 엔딩 (…)
▼ 실제로 받았던 반응
뒤 내용에 이모티콘 작가 도전기도 나오는데, 이모티콘에 한참 열을 올릴 때였다. 내가 사는 지역의 이모티콘 만들기 오픈톡방이 있어서 들어갔다. 초상화 얘기에 웬 이모티콘이냐?
이모티콘 톡의 방장이 원주 문화재단에서 후원하는 청년 전시회 프로젝트 기획자였는데 전시에 참여할 사람을 찾고 있다고 했다. 냉큼 하고 싶다고 지원했다.
지상낙 ‘원주’
캐릭 ‘터전’
이라는 제목의 프로젝트였다. 대상은 청년이고 주제는 일상 탈출이었다. 초상화랑 일상 탈출이랑 무슨 관련이 있겠냐마는 뭐든지 다 이어 붙일 수 있는 법.
마감일이 다가왔을 때 제출하면서 작품 설명을 이렇게 써서 보냈다.
“각 인물들에게서 받은 인상과 그들의 표정을 펜으로 섬세하게 표현하여, 반복적인 일상에 유머러스한 메시지를 주는 작품입니다.”
이거면 됐다고 생각했는데… 기획자는 주제가 일상에서 탈출해서 지상낙원인 원주에서 살아가는 “나” 이다 보니까 조금 더 연관된 설명이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말하자면 스토리텔링이 좀 더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같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다가 내 자화상을 한 점 추가하고 도록에는 이렇게 작품 소개를 하기로 했다.
“원주에 정착하면서 처음으로 그려 본 그림. 그림 속 인물들처럼, 그림 그리는 일로 유명인이 되고 싶은 자신과 꿈을 표현한 작품.”
포장은 어찌 잘했는데 너무 관심종자 같지 않나 싶어서 조금 머쓱했다. 물론 내가 관심에 고픈 관종이 맞기는 하지만 이렇게 정곡을 찔러버리면 변명하고 싶어지는 법이라.
전시는 원주 생활 문화센터 1층 전시실에서 열렸다. 시내에 있어서 버스를 타고 나갔다. 첫날 DP 하는 걸 옆에서 도와드렸다. 전시 참가자 중에 직접 온 사람은 나를 포함해서 두 명밖에 없었는데, 직접 왔으니 어느 위치에 전시할지 선택권을 준다고 해서 가장 잘 보이는 가운데 자리로 골랐다.
제대로 고정하는 장치도 없이 공중에 액자를 매달아두는 방식이라 액자가 흔들거리고 옆으로 돌아갔다. 전시 퀄리티가 썩 좋지는 않았지만, 처음으로 전시라는 이름으로 내 그림을 선보이려니까 가슴이 벅찼다.
▼전시회 사진
소규모 단체전에 한 번 나간 것을 기회 삼아서 이런저런 단체전과 개인전에 참가하면 좋겠다 싶었다. 작은 게 쌓여서 나중에는 예술인 증명까지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