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가끔 할머니의 짙은 주홍빛으로 익은 신 김치가 생각날 때가 있다. 느지막한 여름. 가을이 오기 전 마지막 힘을 내어 열기를 더 할 때가 그렇다.
내 할머니.
외할머니는 엄마가 어린 시절 돌아가셨다. 나로서는 일 년에 한 번 제사상 위에 있는 사진을 보면서 어떤 분이었을까 생각했던 기억만 남아 있다.
10남매를 낳고, 무뚝뚝한 군인 남편과 바람 잘날 없는 집안 살림에 지쳐 병으로 세상을 떠나셨다고 했다.
친할머니는 아부지와도, 엄마와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마지막 기억은 중환자실에서 눈도 뜨지 못하고 가만히 누워 있었던 모습. 쓰러지기 전에는 할미가 미안했다는 말을 꼭 해주고 싶었다던 할머니는 끝내 당신의 입으로는 그 말을 하지 못하셨다.
그래서 난 친할머니나 외할머니에 대한 좋은 추억이나 기억이 아예 없다. 흔히 말하는 “우리 강생이”라고 불려 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외증조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많이 있다. 어린 시절 외증조할머니 댁에서 함께 살았다. 나주에 있는 그 집은 청색 나무 대문이 어른 키보다 낮게 만들어져 있는 집이었다. 양쪽 집과 집 사이 골목으로 열 다섯 걸음쯤 들어서면 골목 끝에 그 청색 나무 대문이 있었다.
청색 나무 대문 바로 옆에는 코스모스가 항상 피었다. 대문 앞에 앉아 흔들흔들하는 코스모스를 보는 것이 좋았다.
대문을 들어서 또 다섯 걸음쯤 들어서면, 시멘트를 발라 정사각형으로 만든 세면장이 있었다. 수도꼭지 하나와 여기저기 찌그러진 은색 세숫대야, 그리고 큰 고무다라이와 파아란색 플라스틱 바가지가 있었다.
아침이면 가족들이 이곳에서 세수를 하고, 점심때 뛰어놀고 돌아오면 등목을 하고, 한 밤중에 일어날 때면 마당 끝자락에 있는 무시무시한 푸세식 화장실에 가고 싶지 않아 이곳에서 살짝 실례를 하곤 했다.
집에는 우리 가족과 할머니, 그리고 삼촌 할아버지도 같이 살았다. 큰 셰퍼드를 비롯해 ‘망구’라고 불렸던 개와 그 개가 낳았던 새끼들 다섯 마리도 같이 살았다. 덩치가 정말 큰 점돌이라고 불렸던 동네에서 대장 역할을 하던 남자 고양이도 함께 살았다. 점돌이는 인기가 어찌나 많은지 담벼락에 앉아 있을 때면 동네 고양이들이 양 옆으로 주르륵 앉아 있곤 했다.
마당에는 작은 대추나무를 비롯해서 키 작은 여러 나무들이 심어져 있었고, 그 나무들을 지나면 담벼락 바로 밑에 할머니의 보물 창고, 김치 장독들이 묻혀 있었다.
여름날 햇볕이 뜨거울 때면, 마루에 상을 차렸다. 장독에서 꺼낸 김치는 원래의 색이 빨간색이 맞나 싶을 정도로 거무튀튀한 주홍색을 띠었다. 그대로 먹을 수 없어서 겉을 한 번 물로 헹구고서야 먹을 수 있었던 그 김치. 하이얀 밥에 차가운 물을 말고, 동색 숟가락으로 밥을 한 움큼 떠, 입에 밀어 넣고 몇 년 동안 장독에서 오늘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그 김치를 아주 작게 잘라 입에 넣으면 짜디짠 맛과 시디신 맛이 어우러져, 여름날의 더위기 한풀 꺾이는 듯했다.
나의 어린 시절, 평온한 장면을 떠올릴 때 가징 먼저 생각나는 그때.
할머니는 꽤 오래 사셨다. 90세가 한참을 넘어서 돌아가셨고, 돌아가시기 몇 년 전, 마지막으로 찾아뵀을 때에도 여전히 그 장독에서 그 김치를 꺼내 주셨다. 이제 힘이 없어 더 담지 못했다고. 이제 김치 없다고.
집으로 돌아서는 길에 사촌들 몰래 내 손만 잡아 끄시고는 바지춤 속에 숨겨 두셨던 작은 분홍 빛 손지갑에서 고이 접혀있는 천 원짜리들을 내 손에 쥐어 주시던 할머니. 잘 살라며 이제 또 언제 볼 수는 있을까 하던 그 마음을 이해하기엔 그때 난 너무 어렸다.
몇 년 뒤 할머니는 돌아가셨고, 정말로 마지막 남은 김치를 한 통 가져왔었다. 마지막 그 김치를 먹으면서 할머니의 마지막 손길이 떠올랐었다.
짜디 짠, 그 시디 신 그 김치.
한 입에 넣을 수 조차 없이 짜고 신 그 김치.
이제 영원히 볼 수 없는.
그래서 늦은 여름이면 항상 생각나는.